이탈리아 포지타노
장마가 지나간 자리는 무더위가 차지했다. 바다에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씨다. 아이들은 파도에 부딪히며 신나게 놀고, 나는 비치타월을 깔고 앉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형형색색 다양한 색으로 줄무늬가 있는 비치타월을 펼칠 때면 언제나 이탈리아 남부 휴양도시 포지타노가 생각난다. 타월은 점점 낡아지지만, 타월 속에 담겨있는 포지타노는 여전히 생생하다.
남편이 꼭 참석하고 싶은 학회가 중국 제남에서 있었고, 그 참에 나도 중국에 따라갔다. 심심할 것을 대비해 유럽 길잡이 책 한 권을 챙겼다. 학회는 순조롭게 끝났다. 남편은 더 많은 공부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일을 알아봐 주기로 한 중국인이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부모상을 당했고, 중국은 애사를 특별히 친한 사람이 아니면 알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많이 미안해했고, 남편이 공부하러 갈 곳을 다시 잘 알아봐 주었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 짐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유럽 길잡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부부는 그대로 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날아갔다. 수중에는 유로화도 달러화도 없고 다른 준비물도 아무것도 없었다. 비행기표를 예매한 후에 파리의 한인 민박만 예약했다. 드골공항에서 카드로 유로를 인출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첫발을 떼었다. 첫 유럽 여행인 프랑스-이탈리아 여행의 시작이었다. 한인 민박에서 다음 도시의 한인 민박을 예약하는 방법으로 숙소를 옮겼다. 그렇게 파리-베네치아-로마-나폴리까지 갔다.
나폴리에서 만난 여행객이 아말피까지 가는 해안도로가 멋있다고 하니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버스를 타고 아말피로 향했다. 아말피로 가는 길에서 아름다운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내릴까 고민하는 사이에 버스는 다시 아말피로 출발했다. 아말피에 가는 길의 아름답다는 해안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말피도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우리는 이미 절벽 마을에 빠져버렸다. 짧은 고민 끝에 돌아나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그 마을로 향했다. 우리의 발길을 붙잡은 그곳은 포지타노였다. 포지타노나 아말피는 중세 시절 이슬람 해적들이 자주 침범해 올 때, 도시를 지키기 쉽도록 경사가 심한 곳에 계단식 마을로 만들고 사대문을 걸어 잠그고 철통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 너무 아름다워 지금은 관광객의 발길로 분주하다. 포지타노의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갔다. 절벽 마을에 둘러싸인 작은 자갈돌로 된 해변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여유 있는 해수욕을 즐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해변에 도착한 우리는 이방인이었다. 노천카페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다가 숙소가 있는 나폴리로 돌아갔다. 다음 날은 나폴리를 관광하기로 했는데, 포지타노가 눈에 밟혀 나폴리 관광을 하루 포기했다. 해수욕 준비를 하고 포지타노로 향했다. 무계획으로 온 여행이었지만, 나름 계획적으로 다녔는데, 이것은 첫 번째 일탈이었고, 첫 번째 휴양이었다. 포지타노에 도착하여 비치타월을 먼저 샀다. 바쁜 여행 속에서 처음으로 누리는 여유였다. 석양이 절벽 마을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 한없이 쉬다가 돌아왔다. 우리 손에는 포지타노 기념품인 고추와 마늘로 된 장식품과 레몬 비누와 비치타월이 들려있었다.
지금은 여행 중간에 적절한 휴식까지 계획하지만, 그때는 젊었고, 시간이 아까운 여행자였다. 욕심만 가득해서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다녔다. 다음 날이면 또 물집 잡힌 발을 혹사하며 하나라도 더 보려는 마음에 쉬지 않았다. 많이 보았지만, 감동은 많이 남지 않았다. 무엇을 봤다는 것뿐. 보름간의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포지타노와 카프리였다. 그곳에서는 시간에 쫓기지 않았다. 아침 해 뜨는 것을 보고 저녁 해 지는 것을 봤다. 휴양(休養 : 쉬면서 양기를 보충함)의 가치를 처음 느꼈다. 오래 머문 만큼 자연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림도 오래 바라보면 그림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작가의 숨겨진 마음을 읽을 때 그 그림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 된다. 그래서 老 시인 나태주는 ‘풀꽃’을 보며 오래 보아야 이쁘다고 말했나 보다. 뭐든 오래 보고 자주 봐야 가치가 보인다.
오래전에 유럽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친구의 아이에게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물었다. 어리고 순진한 그 아이는 ‘호텔이요’라고 대답했다. 유명한 곳을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라 깜짝 놀라면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패키지의 특성상 머물고 감상하는 시간은 짧았을 테니 어린아이가 그곳에서 특별한 것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휴양의 즐거움을 깨달은 후부터는 관광과 휴양을 잘 섞어서 여행한다. 잠시 쉬며 어제의 시간을 되새기고, 내일의 시간을 기대한다.
태양이 강한 햇살을 쏟아붓는다. 비치타월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아이들은 아빠와 파도치기 하느라 바쁘다. 잠시 포지타노로 여행을 갔던 생각을 데려와 우리 동네 바다를 생각해 본다. 포지타노의 절벽은 아니지만, 달맞이 언덕과 백 층짜리 유리 절벽이 있는 곳이다. 여름 햇빛이 주는 여유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