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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Feb 29. 2024

‘피란 도시 부산’을 산책하다

  딸과 흰여울 문화마을을 걷는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잔잔하게 햇볕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다. 흰여울 문화마을의 바다는 언제나 인상파의 그림처럼 윤슬이 반짝인다. 그 바다는 성을 내거나 장난을 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저 할머니의 자장가처럼 자장자장 노래를 부른다. 바다는 그렇게 74년 전에도 떠밀려 내려오는 피란민을 바다 끝에서 품었다.     


  부산은 전쟁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사람들은 남으로 남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저 멀리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가장 안전한 남쪽 마을을 찾아 밀려 내려왔다. 깔때기처럼 사람과 문화와 음식이 부산에 모여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몸만 내려온 사람들은 산 중턱에, 비탈길에 움막을 치며 자리를 잡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자는 힘쓰는 일이고, 여자는 음식 장사였다. 부산에 다양한 음식이 발달한 이유는 전국의 맛이 모인 까닭이다. 釜山은 동구의 어느 산이 가마솥을 닮았다 하여 유래한 이름이란다. (『동국여지승람』) 정말로 부산이라는 의미가 가마솥 산이라면 음식과 찰떡궁합이다. 지금은 당시의 고단했던 피란민들의 터가 관광상품이 되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피란(避亂) 난리를 피해 옮겨간 것.

*피난(避難) 재난을 피해 옮겨간 것.     


  어렸을 때 여름이면 태풍과 장마와 홍수로 ‘피난민’이 학교 강당 바닥에서 날밤을 지새우는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곤 했다. 사극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피란’을 가는 왕과 대신들의 행렬이 그려지기도 했다. 나는 재난을 피하는 것이나 난리를 피하는 것이 모두 ‘피난’인 줄 알았다. 그러나 피란 도시 부산에 살고 있으니 이제야 그 명칭이 다름을 안다.      

  영도구의 흰여울 문화마을도 피란민이 만든 마을이다. 정식 행정 명칭은 ‘영선동’이다. 봉래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하얗게 여울을 만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흰여울 문화마을’이다. 부산은 감천문화마을에서 벽화로 성공한 후 이곳 영선동에도 벽화를 그렸다. 울퉁불퉁 자연스럽게 다져진 길을 걷노라면, 오스트리아 건축가인 훈데르트 바서의 말이 생각난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지금은 배수로가 발달해 마을로 내려오지 않는 여울을 바닥에 그림으로 그렸다. 마치 여울 물줄기 속을 걷는 기분이다. 바다를 보고 땅에 맞춰 제각각의 모양으로 지은 집은 이제 훌륭한 관광상품이 되어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 마치 전쟁 때 피란민을 받아들이듯이, 흰여울 문화마을은 사람들을 잡아당긴다. 아마도 아름다운 풍광과 아기자기한 집들이나, 귀여운 벽화들보다도 원래 이곳이 가진 성질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영선동은 ‘묘박지’로 유명한데, 바다가 잔잔하여 배를 세우기 좋아서이다. 오늘도 흰여울 문화마을 앞바다에는 열서너 척의 배들이 한가로이 정박해 있다. 바다도 잔잔하고 바람도 포근하다. 이것이 흰여울 문화마을의 매력이다. 이런 날은 나도 말없이 걷는 여행자가 되어 피켓 하나 든다.

 ‘부산으로 소풍가자’. 작년에 부산에 놀러 오는 친구들을 환영하기 위해 쓴 피켓인데, 가끔 이렇게 들어도 재미있다.

  <피란 도시 부산>을 찾는 여행에 빠질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서구의 임시수도기념관이다. 서양과 일본의 건축양식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만든 이 건물은 1926년 일제 강점기 때 경상남도지사의 관저로 만들어졌다. 유럽식 이층 벽돌집에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3년간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서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관저에는 ‘사빈당(思份堂)’이라 현판이 붙어 있는데, 독립운동가 한형석 교수의 글씨이다. 관저는 일층에 응접실, 식당, 부엌, 욕실 등이 있고, 이층에는 집무실이 있다. 일본식 건물이라 바닥은 다다미가 깔려있어 신발을 벗어야 한다. 관저 뒤의 기념관에는 피란 시절 부산의 사진이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판잣집, 다방, 부산 배경의 음악들. 건물의 양식도 볼만하지만, 피란 시절에 부산이 수도였음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세 번째 발끝이 향한 곳은 중구에 있는 40계단이다. 그동안 부산의 피란 시절은 초량 이바구길, 감천 문화마을, 흰여울 문화마을, 아미동 비석마을 등지에서 많이 봤지만, 이곳만큼 피란민의 모습이 주인공인 곳은 없다. 피란민의 애환과 향수가 문화관에 그대로 담겨있다. 40계단이 만들어졌을 때는 일제 강점기지만, 전쟁 후 부산으로 피란을 온 사람들의 가족 상봉의 장소가 되었다. 피란민들은 흩어진 가족을 만나기 위해 부산역, 영도다리 아래 그리고 40계단을 헤맸다. 깨지고 가파른 계단에서 피란민들은 고달픈 삶을 이어갔다. 지금은 번듯하여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40계단 문화관’에 천막집, 판잣집, 벽돌집 등등 피란 시절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잘 전시되어 있어서 좋은 공부가 된다.     

국제시장
깡통시장

  금강산도 식후경. 종일 발품만 팔았더니 배가 고프다.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에서 요기라도 해야겠다. 국제시장은 일본이 철수하면서 물건을 팔기 위해 만들어진 곳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까지 거래되면서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국제시장』은 전쟁 이후 격변하는 부산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당시의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잡화점 ‘꽃분이네’는 지금은 카페가 되었다. 국제시장이 다양한 외국 물건이 판매된다면, 깡통시장은 음식점 천지이다. 원래 이름은 ‘사거리 시장’이었는데, 미군 부대의 캔 제품이 팔리면서 깡통시장이 되었다. 깡통시장은 전국 최초 공설시장(1910)이기도 하고, 전국 최초 상설야시장(2013)이다. 야시장이라고 밤에만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낮에도 사람이 많다. 이미 텔레비전을 통해 유명세를 치른 음식점에는 줄이 즐비하다. 하지만 무엇을 고르든 다 맛있으니 한적한 곳에서 딸이 좋아하는 잔치국수를 먹으며 배고픈 위장을 달랜다.     


  딸과 함께 산책한 부산은 어쩌다 보니 피란수도 부산에 대한 것이다. 영도구·서구·중구에서 피란민들이 터를 이루었으니 발걸음 향하는 곳마다 피란수도를 만난다. 부산시의 표어는 <Dynamic Busan>이다. 별칭답게 부산은 어디든 역동적이다. 피란민들이 내려와 억척스럽게 일하고 발전시킨 부산이라 아직도 그 힘이 흐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산항대교에서 내려다본 항구는 컨테이너로 북적인다. 같은 바다인데, 잔잔함과 역동적인 힘이 함께한다. 피란 도시 부산의 매력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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