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헤진 부산항

<부산의 노래, 문학으로 만나다>

by 방수미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는

연락선 난간 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은 사람끼리 음 음 음 음


달빛 아래 허허바다 파도만 치고

부산항 간 곳 없는 검은 수평선

이별만은 무정터라 이별만은 야속터라

더구나 못 잊을 사람끼리 음 음 음 음


가수 남인수 선생은 1942년에 ‘울며 헤진 부산항’ 노래를 부르고 일제 강점기 때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이 노래가 일제의 강제동원을 비판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천황을 위해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만주든 일본이든 가야 한다고 외치던 시절에 이런 노래를 불렀다니 가수의 용기가 놀랍다. 구슬픈 가락으로 눈물을 자아내는 ‘울며 헤진 부산항’은 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첫 번째 노래이기도 하다. 부산사람도 아니면서 부산의 눈물을 닦아주던 남인수 선생은 해방 후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 피란살이 애환을 노래하였다. ‘울며 헤진 부산항’ 이후,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친일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선생에게 평생의 오점으로 남았다. 안타깝다.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다. 언젠가 친정어머니가 일본 어느 지역으로 여행을 가시는데, 친정아버지가 대뜸 “장인어른 징용 갔던 곳으로 여행 가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나의 뇌리에 박혔다. 외할아버지가 강제동원되셨다니. 순간 아찔했다. 영화 <군함도>에서처럼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 뒤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외침은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로 들렸다.

부산은 강제동원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래서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도 부산에 있다. 정신대-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많은 관부재판을 담은 영화 <허스토리>도 부산이 배경이다. 일본으로 차출되던 사람들은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까지 배를 타고 건너갔다. 마치 물건처럼 조선인은 그렇게 옮겨졌다. 하관(시모노세키)과 부산의 이름을 딴 관부연락선이 줄을 이어 바다로 나가던 시절이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듣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외할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하는 외증조할머니의 모습도 보이고, 연락선에 서서 멀어지는 부산 땅을 바라보는 외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내가 부산에 살고 있으니 이 노래에 더 애착이 간다.


방학에 아이들과 대연동에 있는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찾았다. 아이들과 징병, 징용, 위안부 등 강제동원의 종류와 그들의 비참한 삶을 살펴보았다. 그분들은 때로는 돈을 많이 벌게 해 준다는 거짓말에 속았고, 때로는 강제로 끌려갔다. 조선으로 보내준다고 강제로 거둬간 돈은 일본인들이 떼먹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집에 돌아오니 땡전 한 잎 없더라는 증언에는 화가 났다. 지금 일본의 전범 기업들은 월급을 다 줘서 책임이 없다고 우긴다. 강제 노역에 돈까지 떼먹어놓고는 정말 수치도 염치도 양심도 없다. 역사관에는 엄청나게 큰 지도에 사람들이 강제동원으로 끌려갔던 곳의 위치가 찍혀있다. 강제동원의 범위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넓어서 깜짝 놀랐다. 외할아버지는 ‘어디쯤 계셨고, 어떻게 살아서 돌아오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든 살아 돌아오신 것이 기적이다.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외할아버지는 강제‘징용’이 아니고 강제‘징병’되셔서 만주로 끌려가셨다. 외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해주셔서 기억하신단다. 아마 아버지는 일본에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완도에 사셔서 외할아버지가 가신 곳을 일본으로 착각하셨나 보다. 일본이든 만주든 외할아버지가 살아오셔서 다행이다. 외할아버지는 만주행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셨을 것이다. 잠시 착각으로라도 ‘울며 헤진 부산항’에 빠져서 좋았다. 외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가셨다는 생각에 내 노래처럼 들었다. 아니면 크게 와닿지 않고 지나쳤을 노래였을 것이니, 아버지의 착각이 오히려 큰 소득을 준 셈이다.


살아계셨다면 외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백 살이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이라는 끈이 외할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외할아버지는 원체 말씀이 없으셨고, 또 이른 연세에 중풍에 걸려 더 말씀이 없으셨다. 외할아버지는 내 나이 스물일곱에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와 나를 연결하는 기억이 많지 않다. 평소 말씀도 없으시고 어려웠던 외할아버지셨다. 처음 내가 두발자전거를 타게 된 날, 외할아버지는 너무 좋으셨는지 한 바퀴 돌 때마다 천 원씩 주셨다. 아마도 좁은 골목을 열 바퀴는 돌았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손녀딸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이뻤는지 불편한 몸으로 꼿꼿하게 서서 내가 자전거 타는 모습을 바라보셨다. 석양이 곱게 물 들어갈 때, 외할아버지와 나의 모습은 한 폭의 동화처럼 기억된다.


해방된 지 벌써 78년이나 지났다. 강제동원의 해결에 해법이 없다. 식민지와 전쟁에 대하여 반성이 없는 일본은 여전히 무조건 버틴다. 그러는 사이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저승 강을 건넌다. 강제동원 피해자가 모두 세상을 떠나면 일제의 ‘강제동원’은 없는 일이 되는 것일까? 살아계신 분들을 위해서도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도 올곧게 매듭이 지어지면 좋겠다. ‘울며 헤진 부산항’의 노랫말은 아직도 우리에게 슬픔과 한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이전글딸의 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