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세쿼이아의 일 년

아파트 산책로에서 사진 찍기

by 방수미


계절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는 것은 나무이다. 여전히 불볕더위에 옷차림은 얇지만, 나무들은 이미 가을의 색으로 갈아입는다. 단풍나무, 은행나무는 물론 온갖 나무들이 일 년의 한때를 활활 불태운다. 그중에서 가을에 가장 눈에 띄는 나무는 메타세쿼이아이다. 메타세쿼이아는 키가 껑충하지만, 평소에는 두드러지는 나무가 아니다. 초록으로 빛나는 삼각형 머리카락은 가을이 깊어질수록 불타는 구리색을 띤다. 가을에 어느 순간 저 멀리 구릿빛 나무가 보인다면 그것이 메타세쿼이아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만, 갑자기 그 자리로 옮겨온 것 같은 느낌이다.

햇볕 한 줌도 허락하지 않을 듯이 빼곡한 잎을 가진 메타세쿼이아 길은 산책하기 좋다. 남이섬과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은 특별히 더 유명하여 많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잔가지 없이 긴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고대 그리스의 신전처럼 주랑을 이루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서로의 가지들이 만나면 동화에나 나올법한 신비한 동굴 같기도 하다.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는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넘어가는 길에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조성되었다. 지금이야 터널이 뚫리고 길이 발달했지만, 50년 전만 해도 이 언덕을 넘어 송정으로 다녔다. 이제는 ‘송정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가 다듬어져 지역주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산책한다.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넘어가는 초입에 메타세쿼이아가 길게 줄지어 서 있고, 어느 누가 그곳을 ‘고흐의 길’이라고 불렀다. 그 뒤로 그 길은 ‘고흐의 길’이 되었다. 그런데 고흐가 그린 아를의 ‘알리스캉의 가로수길’에 길게 늘어선 나무는 메타세쿼이아가 아니라 포플러 나무다. 두 나무는 가을에 입는 색깔도 다르다. 포플러 나무는 노랗게 물들고,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붉어진다. 포플러는 유럽에서 많이 심어 사이프러스와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나무이다. 포플러가 미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미루(류) 나무라고 불린다. 그러나 메타세쿼이아는 동양의 나무이다. 누군가 잘못 부른 이름이 생명을 얻어 메타세쿼이아와 상관없는 ‘고흐의 길’이라 불리는 것은 아쉽다.

작년 11월에 찍은 사진

멀리 메타세쿼이아가 보이면 일부러 멈춰서 바라보곤 했는데, 그 메타세쿼이아가 우리 아파트 중앙통로에 많이 심겨 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틸틸과 미틸 남매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파랑새가 집 안에 있었듯이, 우리 아파트 안의 메타세쿼이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자주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 벤치에 앉는다. 어느 순간 변화무쌍한 메타세쿼이아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매달 15일에 사진을 찍었다. 메타세쿼이아의 겨울은 생각보다 길다. 12월이 되자마자 앙상해진 메타세쿼이아 가지는 4월이 되어서야 솜털 같은 머리카락을 내밀 듯 연둣빛 잎이 돋아난다. 네발로 기던 아기가 두 발로 일어서는 순간 아장아장 걷고 곧잘 뛰듯이 5월부터는 푸른색 이파리가 빈틈없이 메워졌고, 점점 색도 진해진다. 햇빛을 받은 여름의 메타세쿼이아는 에메랄드빛으로 빛난다. 활기찬 초록의 청년 시절을 보내던 메타세쿼이아는 9월부터 점차 머리를 물들인다. 뿌리에서 먼 꼭대기부터 구릿빛으로 반짝인다. 점차 초록은 연녹색이 되고, 연녹색 머리카락 색은 11월이 되자 붉은 머리로 염색을 마친다. 멀리에서 보면 활활 불타는 것처럼 보인다. 12월에 겨울비와 세찬 바람을 맞으면 구릿빛으로 빛나는 이파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우수수 떨어뜨린다. 머리가 숭숭 빠진 노년의 모습처럼 메타세쿼이아의 가지에는 잎이 하나도 없다. 다른 나무들보다 더 인간의 일생을 닮아 보인다. 여름내 그늘을 주던 메타세쿼이아는 겨울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을 준다. 인간을 닮았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나무이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사진을 찍었다. 열두 개의 사진을 모아놓았더니 시간에 따라 햇빛과 그림자가 제각각이더라. 역시 첫술에 배부를 리 없구나. 이번에는 날짜를 정하는 것보다 시간을 정했다. 어느 날 날씨 좋은 12시로.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 사진을 찍었다. 수시로 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다행히 메타세쿼이아와 그림자가 계절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이제야 만족스럽다. 이제 가을과 겨울만 찍으면 메타세쿼이아의 일 년이 다 담긴다. 사소하지만 보람이 있다. 마치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기분이다.

올해의 봄여름가을

한 해에 열두 번 그렇게 메타세쿼이아를 만나는 날은 이곳이 평범한 아파트가 아니다. 소중한 것을 만나는 시간. 메타세쿼이아와의 만남은 즐거운 소풍이다. 열두 시에 알람이 울린다. 메타세쿼이아를 만나는 시간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구절처럼 오늘도 ‘나의 메타세쿼이아’ 사진을 찍기 위해 공들인다.

“너의 장미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시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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