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지구 부루마불 게임
부루마불 게임을 한다. 주사위를 굴린다. 하나, 둘, 셋, 넷…. 서울에 도착했다. 거금을 지불하고 서울을 소유한다. 도시를 사고 호텔을 짓고 이용요금도 받고 비행기도 탄다. 이보다 즐거운 세계여행은 없다. 종이돈이지만 금세 부자가 된다. 운이 나쁘면 파산도 한다. 실력이 필요 없는 게임이다.
부루마불 게임은 이름부터가 참 고풍스럽다. 블루마블도 아닌 부루마불이라니. 내가 부루마불 게임을 만난 지도 벌써 사십 년이다. 우리집 뿐만 아니라 모든 집에 부루마불 게임이 있었다. 당시에나 지금에나 가장 기본적인 보드게임이 부루마불 게임이다.
오랫동안 잊었던 부루마불 게임을 아이들이 자라면서 다시 만났다. 어렸을 때 기억을 떠올리며 오랜 친구를 만나는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재미없다. 그냥 운이 좋으면 이긴다. 지루하게 게임은 계속되고 시간만 물 흐르듯이 지난다. 파산하고 싶지만, 눈을 반짝이며 놀이를 하는 아이들 때문에 파산하기도 눈치 보인다. 어렸을 때는 매일 새롭고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단순한 놀이는 재미없는가 보다. 속절없이 지나는 시간이 아까워서 한 시간 이내로 놀이 시간을 정하고,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이 이기기로 했다. 현실이나 가상 공간이나 현금이 최고라는 생각에 웃음이 피식 나온다. 아이들도 종이돈에 사활을 걸고 게임을 한다. 아이들은 돈이 좋을까, 이기는 것이 좋을까. 부루마불 게임보다 아이들을 보는 재미가 더 크다.
작은 아이는 부루마불 게임을 통해 한글과 산수를 배웠다. 글자를 모르던 일곱 살 아이는 엄마와 누나에게 물어보면서 게임을 하는 것이 싫었나보다. 도시 이름을 통으로 외웠고, 순식간에 계산을 했다. 수도와 나라를 알았고, 대륙을 이해했다. 그리고 수도에 따라 지불 비용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도 알았다. 자연스레 세계지리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생각지도 않았던 큰 소득이다. 주사위를 통해 세계여행을 한다.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 콩코드 비행기를 타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무인도에 갇혀서 명상의 시간도 갖는다. 재미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의미를 찾으니 굉장한 게임이었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점차 복잡한 게임을 더 좋아한다. 부루마불 게임은 이제 책장 위에 놓인 채 먼지만 쌓이고 있다.
요즘 부루마불 게임 대신에 눈에 불을 켜고 하는 것은 루미큐브이다. 규칙이 복잡하지 않고 운도 필요하고 계산도 잘해야 한다. 주말 저녁에는 식탁에 모여서 정해진 타일을 판에 올리면서 게임을 시작한다. 이 분 안에 가진 타일을 내려 놓든지 새 타일을 가져가야 한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우리의 애타는 마음을 아랑곳 하지 않고 물처럼 내려간다. 이기고 싶어서 온 정신을 집중한다. 엄마라고 내가 아이들을 봐주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더 잘한다. 타일을 잘 이어붙이고 해체하여 조합을 잘한다. 숨도 안 쉬고 작은 타일만 내려다보지만, 오늘도 내가 졌다.
‘치매 예방에 딱 좋겠는데.’ 루미큐브를 하다가 생각한다. 한때는 노인들이 고스톱을 치는 것은 치매 예방에 좋다고 많이 장려했었다. 고스톱은 지능적인 게임이기에 그 말은 맞다. 예전에 어른들은 모이면 고스톱을 치고, 아이들은 민화투를 쳤다. 삼삼오오 쪼그리고 앉아서 허리가 아플 때까지 화투를 쳤다. 사람들은 초상집에서도 신나게 고스톱을 쳤다. 그렇게 대국민 놀이수단이었던 고스톱이 언젠가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타락한 노름이라는 인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고스톱은 돈을 걸고 하는 놀이이기에 일 점당 십 원씩 계산하는 노인정 고스톱조차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나도 그랬다. 아이가 어렸을 때 시어머니가 화투패로 그림 맞추기를 아이에게 가르치는데, 그 모습이 싫었다. 아이는 본가에만 가면 화투를 귀신같이 찾아와서 그림 맞추기를 했다. 어느 날 아이 몰래 화투를 숨겼고, 아이는 그 뒤로 화투를 가지고 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놀이였다. 그림 맞추기도 하고 뒤집었다가 같은 그림을 찾는 기억력놀이도 할 수도 있었다. 지금도 화투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부정한 물건이라는 편견을 가진 것이 아쉽다. 나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화투패를 놓고 그림을 맞추고 놀게 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점차 세상은 보드게임보다 온라인게임에 빠져들고 있다. 온라인게임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쉽게 깔리고 시간과 장소와 인원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은 게임 도중에 대화라고 할 수 없는 괴성을 지르고 단말마와 같은 소리를 지른다. 아이들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라고 하면 얼굴에 화색이 돌고 신나게 한다. 이제 재미있게 도란도란 앉아서 주사위를 굴리던 시대는 저문다. 보드게임은 그저 아직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린이들 놀이로 인식된다. 보드게임에 미련이 남은 나는 아직 그 끝자락을 잡고 부루마불로 세계여행도 가고 루미큐브로 경우의 수를 계산한다. 언제까지 그 줄을 잡을 수 있을까 걱정이다. 내가 부루마불 게임이 시시해진 것처럼 언젠가 아이들도 부루마불 게임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오래간만에 부루마불 게임을 시작한다. 주사위를 굴린다. 지구촌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월급도 나온다. ‘제발, 부산! 부산!’ 좋아하는 도시를 갖고 싶어서 안달이다. 상대방에게 그 기회가 먼저 오면 마치 내 것을 빼앗긴 것 같다.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마음을 접고 부루마불 게임에 애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 유쾌한 탄식과 즐거운 대화가 오가는 부루마불이 좋다. 입으로 하는 세계여행일지라도 여행은 행복하다. 언젠가 부루마불에 있는 도시들을 다 가보고 싶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겠지만,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여행이다. 내 어린 시절과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이 부루마불 게임으로 중첩된다. 다시 내 차례다. 주사위를 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