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간지『여기』60호 2024 봄호
2023년 가을에 다녀온 문학기행문을
2024년 문학계간지 봄호에 제출하면서
이제야 브런치스토리에 올립니다.
咸陽. 이름에 햇볕이 가득 담겨 있다. 지리산 자락 아래 조그만 고을에는 예로부터 선비들의 햇볕이 두루 미쳤다. 신라 시대는 최치원, 조선 시대는 박지원이 이곳에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선비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오늘 우리는 선비들을 만나러 간다.
우리나라 역사에 최치원 선생만큼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똑똑한 선생은 어린 나이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외국인 시험인 빈공과 장원을 했고, 「토황소격문」으로 반란군 황소를 놀라게 했다. 당나라 장안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를 신라 헌강왕은 경주로 불러들였다. 외국인에게도 기회를 주던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최치원 선생은 신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귀국했다. 성골과 진골에게 권력이 집중된 골품제도는 육두품이 깰 수 없는 골이 깊은 신분제도였다. 최치원 선생은 헌강왕과 진성여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중앙정부에서는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최치원 선생은 천령(함양), 태산(정읍), 부성(서산)에서 태수를 하며 중앙정부에서 못 펼친 애민 사상으로 백성을 품었다. 그중에 함양은 최치원 선생이 위천의 범람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을 위해 인공숲을 조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숲 상림(上林)은 그렇게 1,1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상림은 쉬어 가기 좋은 깊은 그늘을 지금도 제공한다. 백 년 전인 1923년에 경주 최씨 문중에서 최치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를 세웠다. 최치원 신도비는 거북이가 비석을 받치고, 용 두 마리가 비석을 보호하는 형상이다. 육지에 올라온 듯 발가락이 모두 드러난 거북이는 여의주를 물고 이빨을 모두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마치 자기가 등에 인 것이 누구의 신도비인지 아는 것처럼.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함양 상림을 걷는다. 숲도랑의 맑은 물은 졸졸 흐르고, 깊은 숲 사이로 햇빛이 반짝인다. 상림을 걸으며 최치원 선생을 생각한다. 느티나무와 개어서나무가 서로 뿌리를 합쳐 조화롭게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연리목 ‘사랑 나무’이다. 상림의 사랑 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부부의 금실일 수도 있고, 최치원 선생의 백성 사랑일 수도 있겠다. 사운정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사운정(思雲亭)은 외로운 구름, 고운(孤雲) 최치원을 생각하여 만든 정자란다. 어쩌면 가진 능력을 맘껏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천년이 지나도록 생각해 주고 뜻을 받드는 이들이 많으니 마음씨도 고운 최치원 선생은 행복한 사람이라 해야겠다.
상림은 함양군에서 공들여 관리한다. 아름다운 꽃밭이 너른 들을 이루어 꽃이 계속 이어진다. 여름의 연꽃이 지자, 지금은 불타오르듯 빨간 빅베고니아가 상림을 차지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상림을 뒤로하고 맛있는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식당 이름도 선비와 어울리는 <예다믄>. 예가 담긴 정갈한 한 상을 받아 맛있게 먹고 상림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포레스트>에서 함양 특산품인 오미자차를 한잔 마시니 상림을 다 가진 기분이다.
함양에는 ‘선비길’이 있는데 화림동 계곡 6km 길이에 있는 네 개의 정자가 자리 잡은 길이다.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 농월정을 보고 있노라니 이런 풍광이면 시가 저절로 나오겠다. 먼저 동호 장만리 선생의 후손들이 지은 동호정(東湖亭)에 도착했다. 마침 함양문화원에서 행사가 있는 듯 민요와 창이 울려 퍼진다. 얼쑤. 얼쑤. 추임새가 저절로 나온다. 동호정을 받치고 있는 누하주는 도끼로 툭툭 쳐서 만들어 투박하고 거친 맛이 일품인데 장만리 선생의 성품이 느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 피신길에 선조를 등에 업고 십 리를 달린 선생의 담백하고 투박한 마음 말이다. 그런 마음을 담아 그의 후손들이 누하주를 자연 그대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동호정 건너 너럭바위 차일암으로 건너가니, 마치 결계를 지나 무릉도원에 온 것 같다. 여전히 동호정 앞에서 울리는 풍악 소리가 들린다. 물에 비친 그림자까지 놓치지 않고 사진에 담으며 오늘을 가슴에 새긴다.
군자정은 정여창 선생을 기려 만든 정자인데 처가가 있던 이곳을 선생이 자주 찾으셨단다. 선생의 후손이 군자정을 만들어 ‘군자가 머물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君子亭)이라 하였다. 동호정에 비해 아담하고 소박하지만, 바위에 우뚝 세워 정여창 선생의 성품을 그대로 담고 있다. 두 번의 사화를 거치며 부관참시되는 비운을 겪었지만, 공자의 말씀을 실천함을 제일로 여긴 선생은 나중에 복권되어 조선 오현의 자리에 올랐다.
거연정의 시작은 1640년이다. 억새로 만든 정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고, 나중에 철폐된 서원의 자재를 가져다 재건립하고 다시 20세기 초에 중수되었다고 전해진다. 거연(居然). ‘자연이 살다’라는 이름처럼 거연정의 최초 건설자는 누구인지 모른다. 거연정 옆에 있던 서원을 만든 전시서 선생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거연정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12수 중에 첫 번째 시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따왔다고 하여 시를 찾아봤다. 억새로 만든 정자와 하루 만에 만든 띠집이 참 잘 어울린다.
琴書四十年 거문고와 책읽기 사십 년
幾作山中客 거의 산중의 나그네 되었네
一日茅棟成 하루 만에 띠집 지을 수 있으니
居然我泉石 그렇게 나는 물과 바위 사이에서 사노라
벌써 오후 4시 30분이다. 부산까지 200km를 가야 하니 서둘러 버스로 출발한다. ‘달을 희롱’한다는 농월정(弄月亭)은 지나친다. 차창 사이로 팔작지붕의 농월정을 보며 달이 떴을 때 찾아오겠다고 약속한다. 달빛과 얼마나 잘 어울리면 농월정이라 했을까 궁금하다.
함양 문학기행은 햇볕만큼 따사로운 선비들을 만난 소중한 여행이었다. 함양의 옛 이름, 천령(天嶺). 하늘의 고개에서 선비들이 예를 올리니 함양에 두루두루 좋은 기운이 뻗는다. 천년의 시간을 품은 상림이 또 다른 천 년 동안 만백성의 그늘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양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