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의 『역사』
오래간만에 『역사』를 펼친다. 1,000쪽에 달하는 『역사』는 들기만 해도 무게감이 묵중하다. 수년 전에 그리스 고전 선생님으로부터 『역사』를 배웠고, 헤로토토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나는 『일리아스』를, 남편은 『역사』를 마음에 품고 그리스를 다녀왔다. 그의 마음은 터키에서부터 차를 몰아 구석구석 페르시아 전쟁의 격전지를 돌아보고 싶었겠지만, 시간과 장소의 한계상 중요한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단순히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다루지 않았다. 도시와 나라가 생겨나는 과정과 문화와 풍습과 지리에 대해서 그는 발로 걸으며 기록했다. 들은 것은 들은 대로, 본 것은 본 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명확하게 기록하였다. 『역사』는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숨어있는 주제는 행복이다. 행복에 대해서는 1권에서 크로이소스와 솔론의 대화를 통해 밝히고 있는데 살아서 죽을 때까지 명성과 명예를 얻는 것이다. 지금 한순간 반짝이는 행운에 취하지 말고 끝까지 잘 살다 죽는 것. 이것이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행복이다. 도시와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단합하여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아냈지만, 결국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전쟁으로 그리스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런 모습을 보며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역사』 1권에서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아테네의 현자 솔론에게 묻는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세상의 부를 다 가진 크로이소스였다. 크로이소스의 부는 영어 관용어에도 쓰인다. as rich as Croesus. (크로이소스처럼 부자인). 크로이소스의 질문에 솔론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 한 사람은 텔로스이고 두 번째로 행복하다고 꼽은 사람은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이다. 아르고스에 사는 이 형제는 헤라 신전의 축제에 갈 어머니를 위해 소달구지를 끌고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헤라 여신의 상징이 황소라서 아마 소달구지를 타고 축제에 가야 하나 보다. 많은 사람이 이들을 칭송하자 어머니는 헤라 여신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아들에게 내려주기를 부탁했고, 헤라 여신은 신전에서 잠든 형제에게 죽음을 주었다. 가장 명예로운 순간에 얻은 죽음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그리스 전체가 이 형제를 기리기 위해 입상을 세웠고, 지금도 많은 입상이 남아있다.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의 신화가 스며있는 아르고스의 헤라 신전은 지금 무너진 돌기둥만 남아있다. 햇살을 받은 기둥은 따뜻했고, 김밥처럼 썰어진 돌기둥은 재미있었다. 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신전이라 앞에 올리브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언덕까지 두 마리의 소가 되어 달구지를 끌고 온 형제는 정말 대단하다. 우리 가족은 헤라신전을 둘러보고 결혼과 가정의 신인 헤라 여신에게 가족의 행복을 빌며 내려왔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신화의 여인들을 소환하여 『역사』를 시작하고 역사를 이어갔듯이, 나도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 신화에 이어서 페르시아 전쟁의 격전지로 글을 이어간다.
마라톤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는, 이오니아 편을 들어 페르시아에 적대적인 행동을 한 아테네와 스파르테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래서 1만 정예부대를 보내 마라톤에 상륙시켰으나 아테네의 강렬한 저항으로 패배했다. 페르시아군은 다시 배를 타고 바로 아테네로 향했지만, 아테네군이 42.195km를 달려 도시로 돌아와 전투를 준비하고 있어서 결국 철군했다. 이것이 기원전 490년에 벌어진 두 번째 페르시아 전쟁이다. (기원전 492년의 첫 번째 침략은 배가 풍랑을 만나 실패했다) 근대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은 이러한 일화에 환상적인 장치를 넣어 한 명의 병사가 달려와 승전을 알리고 죽어 그 병사를 기리기 위해 마라톤이라는 장거리 경주를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아테네군 전체가 아테네로 돌아와 아테네를 사수했다. 지금 마라톤은 아름다운 해변이 있어서 과거의 전쟁은 느껴지지 않는다. 전투가 벌어졌던 마라톤 들판에는 지금 그때 죽은 아테네와 플라타이아이의 전사자 무덤 두 개가 있다. 황량한 벌판에 군데군데 오래된 올리브 나무가 심겨 있다. 이천오백 년 전의 함성을 들어보려 귀를 기울였지만, 영혼들이 잠들어 있어 바람 소리조차 침묵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뜨거웠던 곳. 바로 테르모퓔레이다. 이름도 ‘뜨거운 문’이다. 다리우스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 황제가 된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부업을 이어 평생을 그리스 복속에 명운을 걸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대로라면 오백만 명의 군사와 보급부대와 하인들을 데리고 기원전 480년에 황제가 직접 그리스를 침략했다. 북에서 밀려 내려오는 대군을 처음 맞은 곳이 바닷가 산 옆으로 난 좁은 고갯길인 테르모퓔레이다.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가 레오니다스 왕에게 삼백 군사를 맡겨 테르모퓔레를 사수하게 했다. 스파르타인 말고도 다양한 도시국가에서 온 오천 명이 레오니다스를 따랐다. 사흘 동안 페르시아인은 단 한 명도 고갯길을 지날 수 없었다. 아마도 돈에 눈이 어두운 매국노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에피알테스라는 멜리스인이 다른 오솔길을 알려주어 크세르크세스는 오솔길로 군대로 보내 그리스군을 양쪽에서 포위했다. 레오니다스는 포위된 것을 알게 되자 다른 그리스인을 모두 내보내고 스파르타군만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끝내 떠나지 않은 테스티아이 사백과 스파르타 삼백은 테르모퓔레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천오백 년이 지나면서 바다의 좁은 길목은 평야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테르모퓔레는 해안선이 보이지 않는 넓은 광야 한복판에 있다. “와서 가져가라”라고 외치며 긴 창을 들고 서 있는 레오니다스의 동상과 테스티아이의 부러진 날개 추모비 앞에 서니 목숨을 바쳐 국가를 사수하려 한 이들의 마음이 있어서 끝내 페르시아군을 몰아냈으리라 여겨진다.
레오니다스의 묘는 스파르타에 있다. 가장 남쪽에 있는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 내내 미적거리며 관망했다. 심지어 모략 때문에 왕위에서 쫓겨난 데마라토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그들에게 길 안내를 하고 있었다. 레오니다스가 없었다면 스파르타는 절대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스 육군이 테르모퓔레에서 사흘 동안 싸우고 있을 때 그 옆의 아르테미시온에서는 삼 일간 해전이 있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아테네가 주도했다. 처음에 그리스 함선이 우세했지만, 페르시아 함선이 계속 밀어붙이고 테르모퓔레 패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리스군은 퇴각하였다. 그리스 함선은 마지막 격전지인 살라미스로 향했다. 아르테미시온은 지금 볼로스라는 이름의 중부 중심 도시이다. 이름도 낯선 도시였지만, 아르테미시온을 떠올리니 반갑다. 볼로스의 신화의 이름은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가지러 아르고호를 타고 떠난 이울코스이다. 그날의 격렬한 현장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해변에 앉아 저기려니 하는 마음으로 바다 건너를 바라보았다. 오십 척 나무배 대신에 무쇠로 만든 배들이 서 있는 것을 보니 여기가 예로부터 배대기 좋은 곳이었겠구나 싶다.
델포이는 『역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소이다. 1권부터 크로이소스는 델포이에 사절을 파견하여 신탁받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물을 보냈다. 크로이소스가 보낸 공물은 너무나 유명하여 크세르크세스는 그 공물을 보기 위해 군대 일부를 델포이로 보냈다. 페르시아 군대가 온다는 소식에 델포이인들은 당황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신의 것은 신이 지킬 것이라 하여 사람들은 피난을 갔다. 페르시아인들이 도착했을 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산에서 바위가 굴러오고 중무장한 두 명의 초인이 추격하여 페르시아인들을 도살했다고 『역사』에 나온다.
델포이는 파르낫소스 산꼭대기에 있어 하늘과 맞닿은 느낌이다. 자동차로 가는 중에도 길이 너무 험하고, 꼬불꼬불하여 힘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 거대한 신전을 지었을까 싶으니 너무 대단하다. 도토리형 기둥 일부만 남은 아테네 신전과 거대한 신전에 경기장에 극장까지 갖춘 아폴론 신전을 보니 파르낫소스 산에서 내려오는 영험한 정기가 느껴진다. 신탁을 내렸다는 퓌티아의 바위 앞에 서서 무엇을 물을까 고민하다가 돌아섰다. 『역사』를 보면 신탁을 미리 알아서 좋은 예가 없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함락시키고 불태우고 펠로폰네소스로 향했다.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거짓 정보를 흘려 페르시아 해군을 살라미스로 유인했다. 승리를 예상하며 크세르크세스는 높은 단을 설치하고 느긋하게 해전을 관전했다. 그 장소가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이다. 크세르크세스는 11시간 동안 해전을 보며 결국 페르시아군의 패배를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 페르시아 황제는 전쟁에 넌덜머리가 나서 페르시아로 돌아가고, 나머지 육군을 마르도니우스에게 맡겼다. 자유를 향한 그리스인의 노력이 살라미스에서 길이 남았다. 저 멀리 보이는 섬이 살라미스일까. 시원한 커피 한잔 마시며 승리의 해전을 떠올린다.
그리스는 북부와 남부인 펠로폰네소스반도 사이가 10km 정도밖에 안 된다. 페르시아 대군이 밀려 내려오자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도시국가들은 가장 좁은 길목인 이스트모스에 방벽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다. 그들은 방벽만 믿고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말 잘하는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들을 찾아가 아테네가 무너지면 방벽도 무너질 것이라고 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도시들이 적극적으로 테르모퓔레와 살라미스에 참전했다. 결국 살라미스에서 승리하여 페르시아군이 이스트모스 방벽까지 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거의 무너져 있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아마도 높았을 방벽은 낮아져서 아무나 올라갈 수 있다. 방벽에 올라서니 방벽을 만드는 그리스인들의 함성이 들린다. 잔잔했던 마라톤과 피레우와 다르게 이스트모스 방벽에서는 심장이 울리고 환영이 보인다. 돌을 나르고 쌓는 그리스 병사들 사이에 나도 서 있다. 마음의 북소리를 진정시키고 다시 이동한다.
그리스 신화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있다. 불길한 신탁을 받고 산에 버려진 아이는 커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어 테베의 역병을 몰아냈지만, 자신의 부정으로 다시 역병이 돌자 그 원인을 찾다가 진실을 알게 된 불운한 사람. 결국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채 그리스를 돌아다니다 생을 마쳤다는 오이디푸스이다. 그 오이디푸스가 버려진 산이 키타이론산인데, 바로 키타이론산과 테베 사이에 있는 평야가 플라타이아이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돌아갔지만, 마르도니우스에게는 아직 강력한 십만의 육군이 있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기원전 479년)에서 마르도니우스는 전사하고 마침내 세 번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의 플라타이아이 벌판은 잡풀이 주인공이다. 허허벌판 플라타이아이까지 돌고 나니 『역사』의 헤로도토스를 따라 걸은 기분이다.
헤로도토스의 Histories Apodexis(탐사보고서)는 歷史의 뿌리가 되었다. 그가 걷고 또 걸은 길과 시간은 숫자로 바꿀 수 없다.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서쪽으로는 그리스,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스키타이까지 돌아다녔다. 그는 사실에 근거하여 서술하려 했지만, 굳이 본인이 들은 것을 빼놓지도 않았다. 전해지는 것은 보고들은 대로. 생각은 독자의 몫이다. 헤로도토스가 없었다면 사라져 바람 소리에도 남지 않았을 소중한 기록이다. 첫 장에 쓰여 있는 서문을 읽으며 헤로도토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非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