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에 대하여
지하철을 타려는데 “발빠짐주의” 경고 소리가 시끄럽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스피커로 안전을 경고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끄럽게 울려대는 그 소리가 익숙해져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 귀에는 확성기를 댄 듯이 굉장히 크게 들린다.
둘째가 네 살 때였다. 자주 듣는 그 요란한 소리를 귓등으로 넘기고 아이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타는데, 아이 몸이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에 빠져버렸다. 다행히 한 손을 잡고 있던 터라 대롱대롱 매달렸다. 혹시나 우리를 못 보고 스크린도어가 닫히고 지하철이 출발할까 봐 사색이 되었다. 그 순간 같이 타던 어느 부인이 아이의 반대편 손을 잡고 끌어올려주셨다. 아이는 그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르니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해맑게 웃었다. 아마도 10여 초밖에 걸리지 않은 찰나의 소동이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또 드렸다. 그러면서 아이가 놀라지 않았을까 계속 괜찮은지 살폈다. 그 뒤로는 “발빠짐주의”는 내 귀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금도 나보다 발이 큰 아이들에게 “발이 빠질 수 있다”며 가끔 주의를 준다.
사고는 순간 찰나에 일어난다. 나는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사고가 잦았다. 외할머니가 냇가에서 빨래하는데, 그 옆에서 놀다가 강물에 떠내려간 적이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꼬마를 건졌는데, 마치 운명처럼 그에게는 딸이었고, 나에게는 아빠였다. 아빠는 지금은 정비되어 사라진 빨래터에서 나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똑똑히 기억하신다. 지금도 영웅담처럼 “어떤 애가 떠내려가 건지고 보니 수미더라. 손에는 뽀빠이 봉지 꼭 쥐고, 지금도 뽀빠이 좋아하냐?” 아직 팔려나. 나는 의무처럼 뽀빠이를 꽤 클 때까지 사 먹었다. 나는 또 긴 대나무 꼬챙이가 목에 찔린 적도 있다. 좀 컸을 때인지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있어서 설마 내가 대나무 꼬챙이를 입에 끼고 외갓집 마루에서 떨어졌겠어? 했는데, 어느 날 외숙모가 말씀해주셔서 실제 있었던 일임을 알았다. 나의 부주의한 사고사에 하나를 더 보태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나는 전화선이 감겨있는 큰 통 위에서 떨어져 왼쪽 허벅지가 파였다. 아마 샤일록이 탐냈을 안토니오의 살덩이처럼. 지금도 허벅지를 가로지르며 여섯 개의 바늘자국이 큼직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때는 집집에 전화를 설치하던 때라 꽤 오랫동안 그 기계를 봤는데, 보기에도 위험하고 흉측하고 높이도 높은 그 통 위에 120cm의 내가 어떻게 그리고 왜 올라갔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빼빼 마른 몸에서 패일 살덩이가 있었는지, 훈장처럼 아직도 선명한 꿰맨 자국이 그 일이 꿈이 아님을 증명한다.
지금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안전염려증이 있다. 내가 겪은 일도 그렇고 사고는 한순간의 부주의에서 일어남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화상은 더 그렇다. 결혼 초 손님을 초대해 요리를 바쁘게 준비했다. 새우튀김을 하고 다른 요리를 하려고 튀김기를 치우다 손잡이가 뜨거워 손을 놓치고 말았다. 막 불을 끈 뜨거운 기름은 내 발을 타고 흘렀고, 바닥을 닿고 튀어 오른 기름방울은 팔과 얼굴에 화상을 입혔다. 다행히 나는 지금 흔적 없이 잘 나았다. 그 뒤로 화상을 입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부분 부주의해서 일어난다. 아기들 눈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증기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가 보다. 뿌연 김이 구름처럼 보이는지 보행기를 탄 아기의 손은 간혹 외계인같이 늘어나 닿지 않을 거리에 있는 커피잔을 엎기도 하고, 전기밥통의 수증기를 잡으려 손을 내밀어 다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람의 눈이 두 개인 이유가 길을 걸어도 하나는 앞을 보고, 하나는 아이를 보게 하기 위함이라 여겼다. 찰나의 부주의와 위험을 생각하지 않은 행동은 화를 부른다. 항상 나를 빗대서 아이들을 본다. 타산지석이 아니고 자산지석이다. 심지어 우리 집은 소파 위에 서 있는 행동도 못한다. 다행히 아이들은 철저한 학습으로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제 조금 컸다고 내 눈이 방심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비상등을 켤 준비상태이다.
“발빠짐주의”를 들으며 지하철을 내린다. 보폭을 크게 해서 성큼 걷는다. 내 마음을 아는지 내린 정거장 문 앞에는 발빠짐주의가 그림과 글로 강조되어 있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라는 표어처럼. “발빠짐주의”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