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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Apr 24. 2024

다 같이 돌자 ‘동래’ 한 바퀴

임진왜란의 시작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戰死易 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고니시 유키나가 : 싸우겠다면 싸우겠으나,

                        싸우지 않겠다면 길을 빌려 달라.

       송상현 : 싸워서 죽기는 쉽고,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1592년 음력 4월 15일에 있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동래부사 송상현의 목책 대화이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만여 군대를 몰아 조선을 침략했다.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분을 고니시 유키나가가 송상현 부사에게 전한 것이다. 왜군은 4월 14일 오전에 부산진성에 도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다대포를, 한 부대는 동래성을 에워쌌다. 이미 왜군의 위세를 알고 있는 송상현 부사였지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침략에 맞서 싸우다 결국 순절하였다.      

  오늘 발걸음은 임진왜란의 아픔이 남아 있고, 송상현 부사의 혼이 담긴 동래로 향한다.      

  2005년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을 건설하던 도중에 임진왜란 당시 인골과 유물이 수장된 동래읍성 해자가 발견되었다. 역사적 가치와 공공시설의 필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수안역 안에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만들었다. 역사관의 규모는 작지만, 동래읍성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과 해자에서 발견된 유물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진품은 부산박물관 등에서 전시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갑옷은 조선 전기 무구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단다.

  역사관에 복제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품도 하나 있다. 바로 해자이다. 해자의 벽은 폭이 5m이고 높이가 2.5m쯤이다. 해자는 깬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바닥에 목책을 박아 성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지금 해자는 발견된 위치만 남기고, 도시철도를 건설하면서 몇 미터 안쪽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유럽이나 일본의 해자는 성벽 아래에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평화시대가 계속된 조선의 읍성이라 그런지 햬자가 널찍이 떨어져 있다. 동래읍성의 해자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해자가 있었음을 새롭게 배운다.

  동래부순절도나 부산진순절도를 보면 빨간색 깃발이 펄럭인다. 바로 수자기(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다는 깃발)이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도 수자기의 의미를 살려 바닥에 수자기 모양을 새겨 넣었다. 모르면 밟고 지나갔을 텐데, 해설사 선생님 설명에 경건한 마음을 가진다.      

  동래성 전투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동래부순절도이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에도 있고, 충렬사 기념관에도 있고, 부산박물관에도 있다. 부산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서울 육군박물관에 있다. 동래부순절도에는 송상현 부사가 세 군데에 그려져 있다. 긴박한 동래성 전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그림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제일 먼저 보이는 송상현 부사는 남문 위에 서 있다. 송부사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낸 목책에 답을 적어 남문 앞에 던져 놓았다. 두 번째 송상현 부사는 동쪽 성벽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 세 번째는 패배를 직감하고 객사 앞에서 관복을 입은 채 한양을 향해 절하는 모습이다. 동래부순절도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가운데 오른쪽 동헌 담장을 넘어 송상현 부사에게 가려는 소실 금섬의 모습과 왼쪽에 지붕에서 기왓장을 던지며 왜군에 저항하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모습이다. 이렇게 관군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 강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모두 몰살당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이 와중에 저만 살겠다고 북문을 지나 도망치는 경상좌병사 이각의 모습도 신랄하게 비판적으로 그렸다.

   「충렬사」에는 동래부순절도뿐만 아니라 부산진순절도도 있는데, 부산 앞바다를 까맣게 배로 가득 메운 왜군과 정발 첨사가 부산진성에서 대치하는 그림이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정발 첨사도 전사하고 말았다. 부산진순절도에도 정발 첨사의 소실 애향이 그려져 있다. 충렬사 왼쪽에 있는 의열각은 금섬과 애향과 지붕 위의 두 여인을 모신 곳이다.

  충렬사는 동래부의 송상현, 부산진의 정발, 다대진의 윤흥신 등 93명의 호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래서 충렬사(忠烈祠)는 절寺가 아니고 제사祠를 붙인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 때부터 송공단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것을 인조 때에 이르러 「충렬사」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명칭도 변경되었다.  1970년대에 원래 있던 충렬사를 모두 부수고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지었다. 이순신 통제사를 모신 통영의 충렬사와 비교하면 땅과 전각이 가진 역사적 가치도 있을 텐데, 참 아쉽다.      

  이제 임진왜란의 격전지인 「동래읍성」으로 향한다. 동래읍성은 고려 우왕 때 처음 지었고, 세종 때 확장되었다.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때 모두 파괴되었다가 영조 때 다시 건축하였다. 현재는 북문 근처만 남아있고, 다른 문들은 표지석만 남긴 채 역사 속에 사라졌다. 지금은 임진왜란 당시의 함성은 사라지고 산책하기 좋은 쾌적한 공원이 되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동래읍성 역사축제가 열린다. 동래읍성 역사축제는 벌써 40년이나 되어 올해도 화려한 큰판이 기대된다. 동래학춤, 줄타기, 춤 겨루기, 가요제 등 프로그램 팸플릿을 들고 다니며 잘 챙겨봐야 할 정도로 볼거리가 아주 많은 축제인데, 그중에서 동래성 전투 재현 뮤지컬이 가장 최고이다. 북문 안의 경사진 비탈에서 하는 뮤지컬인데, 송상현 부사가 왜군에 맞서 싸우는 대목을 노래한다. 정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숭고한 공연이라 뮤지컬이 끝나면 사람들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젖어 있다. 이미 소문이 날 만큼 유명한 공연이라 관객석이 되는 산비탈은 빼곡하게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다.      

  「송공단」까지 찾으면 동래 한 바퀴를 거의 돈 셈이다. 송공단은 송상현 부사가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자리에 설치한 단이다. 선조 때부터 동서남북 4단에 송상현 부사, 정발 첨사, 윤흥신 첨사를 같이 모셨다가 지금은 좌천동에 정공단, 다대동에 윤공단을 만들어 따로 모시게 되면서 이곳을 송공단이라 부른다. 송상현 부사가 전사하셨을 때 나이는 41세이다. 사십대라는 젊은 나이에 고개가 숙여진다. 비록 파죽지세로 몰아치는 왜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한양까지 빼앗겼지만, 왜군을 막아 싸웠던 동래의 함성은 흩어지지 않고 의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이 땅에서 왜군을 몰아냈다.     

  동래의 힘은 임진왜란에 머물지 않고 이어져 일제 강점기 때 학생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20년대에 동래고보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하느라 졸업생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장군들의 기개가 수백 년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내가 걸은 길은 단순한 동네 한 바퀴가 아니고 잡초처럼 끈질긴 東萊 한 바퀴이다. 항상 마음에 우리의 조상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새기고 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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