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이후
옛날옛날에 중국의 변방에 한 노인이 살았다. 말 한 마리가 집을 나가 이웃들이 걱정하자 괜찮다고 말하고, 집 나간 말이 다른 말과 함께 돌아오니 오히려 걱정하고, 새로 온 말을 타다가 아들이 떨어지자 또 괜찮다고 했는데, 그 아들은 다리를 다친 탓에 군역에서 빠졌다…. 여기에서 고사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변방 노인의 말)가 탄생했다.
고등학교 한문 시간이었을까, 새옹지마를 배운 뒤로 세상에 좋기만 한 것도, 안 좋기만 한 것도 없음을 알았다. 좋은 일이 생긴 이후는 잘 모르겠지만, 안 좋은 일이 생긴 이후로는 크고 작게 교훈을 삼아 상황을 개선하여 더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거만한 마음에 복종하여 잠시 새옹지마를 잊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백 점을 맞고 나는 몹시 거만해졌었나 보다. 칠십 번의 시험 중에 이번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어려웠다고 하니 더 우쭐해졌다. 가족과 친구들의 칭찬이 이어졌고, 마치 이번 시험에 백 점을 맞은 사람은 나 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한국사를 강의하는 최태성 선생님의 「별별 한국사연구소」에서 <한능검 70회 만점자 동창회>를 한다는 소식에 나는 당연히 내가 초대받을 줄 알았다. 신청 조건 중에 만점 후기 영상이 있는데, 영상을 만들어본 적 없는 아날로그 세대라 걱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필요한 내용을 깔끔하게 만들어 올리고 신청했다. 영상은 만족스러웠고 최태성 선생님이 이것을 본다면 무조건 나를 초대할 걸라고 생각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반 진담, 반 농담으로 별별 연구소에 같이 가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그런 즐거움 속에 나는 더 거만해졌다. 그러나 유튜브 <<최태성 1t v 라이브>>에서 생방송으로 발표한 70회 만점자 동창회 초대 손님 다섯 명 중에 나는 없었다. 식구들은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의 기쁨을 함께 하겠다며 하던 공부를 멈추고 라이브를 보고 있었는데 마지막 다섯 번째 별님까지 호명되자 갑자기 집안 분위기는 급강하하였다. 식구들은 할 말을 잃은 속에서도 나를 위로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괜찮은 척했지만, 너무 심하게 김칫국을 마신 터라 목이 막혔다. 아마도 엄마를 위로하려는 행동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아들이 내 무릎에 앉으려 하자 나도 모르게 아들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아마도 내 눈에는 아들이 철없이 엄마의 기분도 살피지 않는 것처럼 느꼈던 것 같다. 안 그래도 공기가 무거운 집안에는 더 깊은 정적이 흘렀다. 식구들은 당황한 채 나를 바라봤다. 아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원망 섞인 얼굴로 방으로 가서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그 순간 내 잘못을 깨닫고 아들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달래주었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들은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고 계속 울었다. 미안한 마음은 들지만, 탈락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는 결국 중간에 달래주는 것을 멈추었다. 딸과 남편에게도 짧게 사과했지만, 솔직히 오늘은 내가 위로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칠흑보다 더 짙은 어둠이 집안에 내리깔렸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다행히 아침이 되어서 미망에서 벗어나 가족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한 번 더 했더니 아들도 마음을 풀었다.
토요일에는 울산에서 돌잔치가 있었고, 일요일에는 귀한 손님이 초대되어 이래저래 마음과 몸이 바쁜 주말이었다. 일요일 저녁 9시에야 손님이 가시고 남편과 함께 배웅하고 들어오는데, 현관문에 낯선 종이가 붙어 있었다. 뭐지? 하고 문을 열었더니, 우리 앞에 딸이 카메라인 척 스마트폰을 들이대며 영상을 찍는다. 마치 리포터처럼 우리를 의자에 안내해서 <천천 연구소 만점자 동창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간혹 재미있는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곤 하던 딸이다. 만점자 동창회에 초대받지 못해 실망한 엄마를 위해 실감 나게 ppt도 만들고, 손 글씨로 별별 연구소를 따라서 썼다. 진짜 만점자 동창회는 안 가봐서 비교할 수 없지만, 딸이 마련한 동창회도 속이 꽉 찬 과일처럼 알차고 재미있었다. 나도 울고 남편도 울었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도 눈물이 난다. 고마움의 눈물이고, 부끄러움의 눈물이다. 나는 너무 부끄럽고 못난 엄마였다.
언제 준비하고 언제 연습했을까 물어보니 금요일 밤에 생각했고, 토요일 아침부터 틈틈이 준비했단다. 울산 가는 차 안에서 동생과 상의하고, 역사 문제 맞추기 이벤트는 동생이 만들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아이는 별별 연구소 초대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물어봤는데,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이야기해줬다. 이름이 천천 연구소인 이유는 가족의 성이 千 씨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재치 있게 별별 연구소의 별님을 천천 연구소의 하늘님으로 바꾸어 동창회를 진행했다. 너무 행복한 마음에 네 식구가 얼싸안고 감동을 나누었다. 만약에 별별 연구소에 초대받아 갔다면 결코 없었을 천천 연구소 동창회이다. 집 나간 노인의 말이 다른 말을 데려왔듯이 우리 가족에게도 한능검 백 점보다 더 큰 추억이 생겼다.
이번 일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항상 겸손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는데, 최근에 좋은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작은 영광에 취해 점점 거만해져서 가족의 기분을 살피지 않았다. 아마도 어쩌면 친구들과의 사이에서도 나도 모르게 거만이 끼어들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변방의 노인처럼 나쁜 일에 슬퍼하지 않고, 좋은 일에 의기양양하지 않고 물이 흘러가듯이 잔잔하게. 지금의 나에게 교훈이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듯이, 나도 아이들에게 더 좋은 엄마, 남편에게 더 좋은 아내가 되겠다고 마음속에 크게 다짐한다.
덧말>
한국사별별연구소 큰별쌤 만점펜도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