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달 모두 좋은 부산이다. 봄이면 살랑살랑 봄바람맞으며 초량 이바구길에서 168 계단을 오르기 좋고, 여름이면 해운대해수욕장에서 파도를 즐기기 좋고, 겨울이면 케이블카 타고 금정산에 올라 파전에 막걸리 한잔 걸치기 좋다. 그리고 가을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있어서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월이면 해운대구에 있는 영화의 전당을 중심으로 축제가 시작된다. 평소에는 조용히 잠들어 있던 영화의 전당 앞 광장에는 다양한 부스들이 설치되어 시끌벅적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여기저기 포토존과 포토월이 있어서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관광객들을 보는 재미도 있다. 외국인도 많고 내국인도 많다. 다들 영화를 즐기는 마음은 한마음이다. 빈 레드카펫에서 여배우처럼 당당하게 걷다가 커피 한 잔을 들고 나무 의자에 앉아 영화제 카탈로그를 읽는다. 여름과 가을 사이, 따사로운 햇볕 속에 바람은 춤을 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29년째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처음 시작하고 친구들은 몇 박 며칠씩 학교 수업도 제친 채 영화를 본다고 부산으로 달려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같이 다니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부산으로 이사 온 지 십 년. 이제는 해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을 보러 간다.
2015년에 처음 본 영화는 에티오피아의 『양』인데,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영화 기술이 세련되지 않았지만, 주인공 에프람이 도전과 모험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외에도 해마다 상징처럼 남는 영화들이 있다. 2018년의 『아산드히미타의 비밀』이나 2019년 『하이파 거리』, 『그리스 휴양기』와 『안티고네』, 2021년 『불』, 2022년 『바람의 향기』, 2023년 『하늘을 달려』들이다. 국제영화제답게 영화를 출품하는 나라는 굉장히 다양하다. 나는 영화를 고를 때 영화제 기간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나라의 작품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영화를 통해 그 나라를 이해하기 좋기 때문이다. 지도로만 알던 나라들이었다. 비록 화려하고 볼거리가 팡팡 터지지는 않지만, 인간의 본성과 현실에 더 충실하다. 가끔은 우크라이나 내전에 카메라를 깊숙이 들이밀어 생각하지 못했던 전쟁의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기도 하고(2021 『클론다이크』), 몽환적인 분위기에 잠들어버렸던 인도영화도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감독의 마음을 읽기도 하고, 새로운 시선을 느끼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그 나라의 현실을 깨닫기도 한다. 코로나19 때는 입국하지 못한 감독들과 온라인으로 대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2019년의 개막작인 『말도둑들, 시간의 길』에서 감독 예를란 누르무캄베토프과 같이 무대에 올랐던 여주인공 샤말 예슬라모바는 2018년에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배우이다. 비록 그녀의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칸의 여주인공을 만난 기분은 영화를 더 오래 생각나게 했다. 『그리스 휴양기』의 플로리안 고치크 감독은 자신의 숨은 의도를 질문한 남편에게 베스트관객상을 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남편은 감독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작년부터는 중학생이 된 아이들과 한편은 꼭 같이 보려고 한다. 설사 아이들 눈높이에 지루하더라도 의미 있는 시간이라 여겼고, 아이들도 흔쾌히 응해줬다. 2022년에 개막작이었던 『바람의 향기』가 너무 좋아 국적과 제목만 보고 골랐던 작년의 이란 영화는 한 사람 얼굴만 촬영한 다큐멘터리영화여서 아이들은 쿨쿨 자버렸다. 올해 나름 꼼꼼하게 고른 영화는 몽골 영화인 『바람의 도시』이다. 12세 관람가인 청소년 영화였다. 모범생이며 샤먼인 제와 반항기 가득한 심장병 소녀 마랄라의 이야기인데, 전통과 현대가 가지는 가치의 경계 속에서 재미있게 봤다. 외모만큼이나 우리나라와 정서도 비슷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기 좋았다. 지난봄에 보았던 『파묘』도 떠올려지며 우리 삶 속에 여전히 샤먼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신이라고 터부 하기에는 어쩌면 사람이 위기에 빠질 때 기댈 곳이 영적인 존재인 것 같다. 과학의 시대에 종교가 여전히 힘을 떨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올해 본 또 다른 영화는 이란 영화인 『증인』이다. 의붓딸의 죽음에 증인으로 나선 고르바니 부인의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억압과 감시에 대한 사회문제가 깔려 있다.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지만, 감독은 교사노조와 여성과 히잡과 통제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란 영화를 삼 년간 연이어 보았다. 『바람의 향기』와 『올빼미, 정원 그리고 작가』와 『증인』이다. 이 세 편으로 이란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세 영화의 장소적 배경과 종교적 가치가 비교되기도 했다. 『바람의 향기』의 하디 모하게흐 감독은 허허벌판 교통과 통신과 전기의 부재 속에 서로 돕고 돕는 순박함을 다루었고, 『올빼미, 정원 그리고 작가』는 감독이 이란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인 자신의 아버지 마흐무드 다우라타바디의 일대기를 아버지의 회상으로 남겼고, 『증인』은 시종일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소란스럽다. 그동안 이란은 이슬람 율법으로 여자들은 외부 활동을 못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증인』에서 히잡을 거부하고 SNS에 무용학원을 홍보하는 자라, 역사 교사로서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교사노조의 탄압에 맞서는 고르바니, 행동은 함께 못하지만 고르바니에게 성금과 마음으로 연대하는 여교사들, 길에서 쓰러진 고르바니를 도와주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영화는 국가의 통제를 비판했지만, 그 속에서 내가 본 것은 당당하고 주체적인 이란 여자들의 모습이었다. 『증인』은 자라의 어린 딸인 가잘이 히잡을 두르지 않고 맨발에 춤을 추며 거리로 나가는 것으로 끝난다. 마치 그녀의 모습이 이란에 돌풍이 될 것이라는 듯이 집을 가린 장벽은 바람에 뜯겨 나간다.
이제 축제는 끝났다. 깨끗하게 정리된 광장은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일 년 후에 수영강 언저리에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하면 광장은 잠에서 깨어나 축제에 공간을 내줄 것이다. 삼십 년 숙성시킨 포도주처럼 진하고 맛있는 30주년 축제의 시작이다. 어떤 영화들이 또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벌써부터 설렌다.
더하기+
『안티고네』는 2019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후에 2020년에 한국에서 개봉하였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인 「안티고네」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영화로 부산국제영화제 <감독과의 대화>에서 대학 시절부터 「안티고네」를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드디어 만들었다고 하였다. 원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게 아주 잘 만든 영화이고 현대적 재미도 더해진 좋은 영화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