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색다른 세계에서 겪은 색다른 사건에 대해 기술할 때면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쇼펜하우어)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난 항상 지는 사람이다. 위대한 염세주의 철인께서 지목한 '대부분의 사람들' 범주에 딱 들어가는 사람이니 말이다. 뭐 어떤가, 감출 수 없으니 "네, 맞습니다~"해야지.
그럼에도 현장을 향한 패자의 발걸음은 늘 설렌다. 키즈카페로 들어서는 어린아이처럼.
화이트시티 우다이푸르,
이곳에 왜 이 같은 수식어가 붙었는지는 선셋포인트에 올라가면 알게 된다.
서울 남산보다 조금 더 높은 이곳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인 우다이푸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시전체가 흰색이다.
하지만 화이트시티 우다이푸르의 백미는 푸른 호수다. 우다이 왕국의 심장부 시티 팰리스, 일몰을 배경으로 펼쳐진 피촐라 호수, 그 한복판에 자리 잡은 호텔 레이크 팰리스, 우다이푸르의 아이콘들은 옹기종기 호수 주변에 몰려 있다. 이런 풍경은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뷰다. 그렇다. 두브로브니크 스지르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았던 아드리아해의 올드 시티, 버나드 쇼가 '지상의 낙원'이라고 묘사했던 바로 그곳 같은 느낌적인 바로 그 느낌! 굳이 허니문이 아니더라도, 이 도시의 감성은 천년왕국의 농밀한 분위기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그 손짓에 끌려 너무 발품을 팔지는 말자. 화이트시티를 즐기는 방식은 소요(逍遙)보다는 음영(吟詠)하는 게 더 나으니까.
우다이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시티팰리스, 하얗다. 좀 더 정확히는 베이지 톤이다.
시티 팰리스는 인도 여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궁전 가운데 하나다. 이전 여행지에서 궁전 몇 곳을 방문했다면 비싼 입장료까지 내면서 들어갈 필요 없다. 어디를 가든 비슷비슷한 유럽의 대성당과 별반 차이 없다. 그곳이 그곳이다. 그러하니 팰리스를 배경으로 풀샷을 찍었다면 눈 딱 감고 그대로 패스!
호텔 레이크 팰리스? 너무 비싸다!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이 호텔은 007 시리즈 '옥터퍼스'의 로케이션 이후 세계적 명성을 얻더니 1박에 백만 원 이상, 스위트룸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럭셔리 호텔의 대명사가 됐다. 부러움이 일상인 나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갈 곳이 못된다. 가난한 여행자라면 이곳도 패스!
소요음영 하며 현장을 확인한 여행자의 입장에서 강추 1순위를 꼽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자그만디르에 엄지척하겠다.
시티 팰리스 인근 보트 선착장에서 뱃길로 20여 분, 자그만디르에 이르는 보트 투어는 우다이푸르 관광의 백미다. 만디르는 사원, 자그의 사원이란 뜻이다. 자그는 메와르왕조의 가계를 이은 자가트 싱 1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러니까 이곳은 16세기 무굴제국에 밀려 우다이푸르로 피신한 메와르 왕가의 사원이 있는 궁전인 셈이다.
출처 : wikimedia
우다이푸르는 엄청난 유산의 도시는 아니다. 아그라의 타지마할 같은 정교함, 델리의 꾸툽미나르 같은 웅장함, 바라나시의 아르띠 푸자 같은 경건함, 자이푸르의 하와마할 같은 화려함, 맥그로드 간즈의 위대한 평범 같은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눈앞 풍경 한 발치 건너에서 그저 넋 놓고 앉아 있기로 한다. 그런 최적의 장소가 바로 자그만디르다. 이곳에 둥지를 트면 먼발치 시티 팰리스가 눈에 들어오고 지척에 호텔 레이크 팰리스가 손에 잡힐 듯하다. 그런데 이곳의 건축물 이름들은 어쩜 그리 한결같이 궁전들인가. 자그만디르 역시 궁전으로 활용됐던 곳이다. 몰락해 가는 왕조의 슬픔은 아랑곳없이 이곳에서는 황궁의 만찬이 쉼 없이 펼쳐졌다. 무굴제국의 부자간 권력 다툼 당시에는 아버지 자항기르의 추적을 피해 아들 샤 자한이 이곳으로 피신했다. 인도 독립투쟁의 시발점인 세포이 항쟁 당시에는 영국 귀족들의 피신처로도 이용됐던 곳이기도 하다. 무굴 제국을 피해 우다이푸르로 도피한 메와르 왕국은 이어진 식민제국 영국에 충성을 맹약하고 옛 영화를 되찾는 듯했지만 인도의 독립으로 인도 연방에 합병된다. 민(民)을 버리면 민(民)이 버린다. 민초들은 오늘도 패망한 왕조의 궁터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커피를 마신다. 나는 맥주 한잔을 시킨다. 화이트시티에 부는 바람이 물결처럼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