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갑자기 받은 일방적인 통보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그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의기소침해진 모습이 딱해 보였다. 나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마음과 정성을 내주었다. 술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지는 않는지, 마음의 화로 몸이 상하지 않을지 걱정했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친절과 관심을 보였다. 같이 헐뜯고 고충을 나누며 격려와 지지를 공유하려 했다. 내 곁에서 기운을 차리고 마음을 추스르기를 바라는 배려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어 줄 수 있는 귀중한 마음을 꺼내었다. 힘든 순간에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펴주는 것이 당연했다.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나는 그것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주었지만 거의 되돌려 받지 못했다. 그것이 억울하고 원망스러워 가슴을 치면서 나는 다시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가서는 나를 밀어낸다. 같은 극을 만난 자석처럼, 부딪혀서도 만나서도 안 되는 상극처럼, 우리의 마음이 같은 곳을 향해서는 안된다는 어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비켜가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그저 배우자에게 편하게 머물고 기대며 긴장을 놓아도 되는 데,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 부부인데 그는 한사코 거부한다. 못되게 굴면서, 분노를 전가하면서, 날카롭게 할퀴면서, 애정과 호의를 짓밟으면서, 한결같은 신뢰를 묵살하면서, 다정과 희생을 비웃으면서, 연약함을 이용하면서 사랑을 건네는 나를 비수보다 아프게 가슴을 찌르는 말로 후벼 판다. 15년의 시간 그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당신의 마음도 궁금해요. 우리 잠깐 얘기를 나눠요' 나는 그와 오랜 친구처럼 긴장을 풀고 즐겁게 수다를 떨고 싶었다. 단 1분이라도 눈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 싶었다. 그와 깊이 있는 교감을 하고 싶은 욕구였다.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달아났다. 단둘이 밀착되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피했다. 얼굴을 보면서 감정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일을 두려워했다. 가까운 관계에서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일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를 향한 공격이라도 되는 냥 자리를 피하며 방어하기 바빴다. 생각과 마음이 궁금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피하고 드러내지 않은 채 숨어버렸다.
관계 안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평가했다. 둘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모두 내 문제로 바꾸어 버렸다. 내게 뭐가 문제가 있다고 탓하면서 불필요한 갈등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감정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다 알고 있어서 말이 필요 없는 사이라고 했다. 그런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의 감정은 전혀 알아차리거나 반응해주지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곤경에 처한 그에게 손길을 건네는 나를 무참하게 찔렀다. 깊이 교감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을 은폐하려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나를 보면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겁을 먹은 사람처럼, 분노하며 도망쳤다. 너의 다정함이 나의 나쁜 본성을 누그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내가 건네는 다정함을 망가뜨렸다. 환하게 열린 마음을 짓밟으려 작정한 듯 싫어하는 말들을 쏟아부었다. 나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았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깎아내리려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고 불같이 화를 내며 고집을 부렸다. 자기 기분에 섬세하게 맞춰주기를 원하면서 내 가치관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나의 호의를 아무렇지 않게 파괴하면서 불안한 감정을 해소했다.
그의 부당한 침범과 무례한 행동에 힘들어하면 할수록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했다는 듯, 자신은 이런 다툼 따위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네가 어떻게 해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듯, 희열감을 드러냈다. 나는 침울해졌고 그는 즐거워했다. 그것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상관없었다. 그저 자기 감정선 안에서 미친 듯이 과민하게 반응했다. 그의 잘못이 분명한 일도 사과하지 않았다.
낯선 육아에 헤매며 지쳐갈 때도, 집안일과 육아에 도움을 청할 때도, 뒤늦게 시작한 늦둥이 육아에 힘들어할 때도, 경력과 육아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때도, 갑작스럽게 닥친 어지럼증에 병원을 오갈 때도, 퇴근해서도 쉬지 못하고 집안을 종종거릴 때도, 생활비에 쪼들려서 초조해할 때도, 아이들의 진로문제에 불안해할 때도,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다는 듯, 그는 자기 삶을 살았다. 오랫동안 일과 육아로 소모되어 갑작스럽게 질병을 얻었지만 그마저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했다.
계속되는 육아로 집과 직장을 쳇바퀴처럼 오갔다.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나약해졌고 몸도 마음도 취약해졌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 실제로는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지는커녕 비난만 할 것을 알았지만, 나도 모르게 그에게 흐트러진 마음을 드러냈다. 가장 취약한 상태로 휘청거릴 때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는 그밖에 없었다. 어디라도 기댈 곳이 필요했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전하게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아이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마음깊이 밀려오는 외로움과 공허감을 달래지 못해 우울의 늪을 서성거릴 때였다. 그는 공감과 위로 대신에 비난과 조소를 쏟아부었다. 존중과 신뢰와 지지를 원했지만 채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부정하고 거절하고 부당하게 평가했다. 내가 토로하는 모든 일들이 틀리고 잘못됐다고 폄하하고 깎아내리며 공격했다. 한결같이 호소하며 친절과 희생에 노력할수록 나를 함부로 대했다. 이유 없이 악담을 쏟아붓고 별것 아닌 일에도 분노룰 폭발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게 싫어서 많은 것을 떠맡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뿐이었다. 나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의존했지만 상처 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이 이유 없는 비난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 것인가? 정작 잘못은 그가 했는데 왜 내가 자책하고 있을까? 그가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지도록 살피는 마음이, 너의 기준을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 주려는 노력이 왜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 왜 나는 애쓰고 노력할수록 되돌아오는 거센 비난과 무례에서 고통받아야만 하는가? 가장 밀착되고 가까운 관계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왜 나는 그 말고는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을까?
그와 연인으로 지내는 동안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는 쉽게 내쳐버린 삶이었지만 나는 아버지와의 이별도, 그가 의지대로 중단시킨 삶도 인정하지 못했다. 슬펐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리둥절했다. 정신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연인이었던 그에게 의지했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사소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던 그에게 의존했다. 안정된 정서가 부족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로 채우며 아픔을 지웠다. 민감한 비밀을 공유한 그가 누구보다 나에게는 중요한 대상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지금처럼 굶주려 있었다. 그에게 나를 내어 맡기듯 부부가 되었다. 나의 내밀한 고통을 공감해 준 사람이라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시작한 결혼생활이었다.
함께 살았지만 혼자였다. 정서적인 친밀감을 채우지 못했다. 가난한 그의 마음은 비좁았다. 내게 떼어줄 것이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나는 그에게 집착했다. 그가 내게서 조금만 멀어지는 듯한 눈치가 보이면 가늘던 유대감 마저 끊기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와 단절되는 것이 두려웠다. 의견충돌이나 불화가 생길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충격적이 컸다. 나도 모르게 생긴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와 좀 더 함께 있으려고 내 욕구를 숨기고 의견을 감추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받지는 못하면서도 그의 작은 관심에 기뻐하고 감사했다. 무슨 짓을 해도 나는 그를 보며 웃었지만 그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위협하고 분노했다.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운 관계였지만 내가 부족해서 남자를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자책했다. 수많은 물음표를 끌어안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저 다음엔 나아지겠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몰라서 그랬겠지,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한 변명거리로 그를 둘러싸면서 어떻게든 좋은 면을 보려고 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매번 주저하며 한 것은 그가 주입한 말 때문이었다. 여자가 지혜롭지 못하게 남자를 닦달해서는 안된다 그의 말을 덜컥 받아들이고 나를 검열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자각하게 된 건 몇 년 전부터였다. 아무리 되돌이켜 봐도 그의 분노와 비난이 이해되지 않았다. 해결되지 못한 다툼으로 파생된 무수한 생각들이 나를 뒤척이게 했다. 상처받고 부정하고 체념하고 포기하고 울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인내하고 용서하고 묵인할수록 그는 점점 더 포악하고 사납게 덮쳐왔다. 그의 기분에 따라서 눈치를 보느라 나대로 살 수 없는 삶에 숨이 막혔다.
더없이 심술궂은 그를 사랑으로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그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내 사랑이면 그를 치유하고 평온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조금 더 양보하고 먼저 용서하며 비좁더라도 그의 공간을 만들려고 애썼다. 아이들의 사랑과 아내의 헌신이면 가정 안에서 기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희망했다. 연민으로 시작된 사랑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것은 질긴 미련만 흘리고 다녔다.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그를 구원할 수 있다는 허황된 시나리오에 나를 욱여넣었다. 나를 희생해서 그를 살게 하겠다는 잘못된 무의식이었다. 내 사랑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믿었던 맹목적인 순진함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잘못된 관계에서 헛된 희망으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었다. 나 자신의 취약함도 감당하지 못하는 내가 그를 살리겠다니, 오만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우기는 교만이었다. 온전히 그가 직면해야 할 무의식의 긴 그림자는 내 사랑으로도 덮어줄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크게 소리칠수록 더 크게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돌이키면서 애쓰는 내 사랑은 그에게 가로막히고 부딪히고 나가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그에게 더 이상 줄 것도 원하는 것도 없다. 탈진됐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은 이미 바닥나서 걷잡을 수 없이 황량해졌다. 나를 소진시키고 고갈시키는 전혀 행복하지 못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늘 같은 방식으로 다가서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그가, 평온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생채기를 내는 그가, 사랑과 배려를 멸시와 고통으로 되갚는 그가, 진절머리 난다.
관계를 끊어보려고 했지만 위협하는 그에게 맞서지 못했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지만 양육이라는 피치 못할 현실 속에서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게 된다. 헤어질 수 없다면 피하는 방법밖에 없다.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짓밟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핍을 위해 나의 연약함을 이용하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너의 유아적인 언행으로 더 이상 넘어지고 흩어지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나를 지키는 거리, 내가 기쁜 삶을 살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관계로부터 멀어지겠다. 기필코 멀어지겠다. 잘못된 관계로부터 달아나겠다. 기필코 달아나겠다. 기필코, 이젠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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