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에 빠진 기분

feat. la place with 아니 에르노

by 달의뒷면

시간이 꽤나 흐르고 나서야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한참을 지나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것들이 있다. 그렇게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면 가만히 그때에 그곳에 어쩔 줄 몰라하던 나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랬구나... 아..... 그때 내가 그랬던 거구나' 흐릿하던 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얼굴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심지어 곱고 환해 보이기까지 했다. 고단하고 축 처진 뒷모습의 그가 아니었다. 이제야 편안해지셨나 보다 하는 안도감과 함께 화가 났다. 마지막 인사도 없는 돌출 행동으로 가족들을 놀라게 해 놓고도 세상 편하게 잠든 그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에 홀로 된 어머니와 두 동생을 보살피는 가장 역할을 한 장남이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나에게 말한 적이 없다. 할머니의 얘기를 통해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철 모르게 떼도 쓰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아니라 의젓하고 성실한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의 빼앗긴 어린 시절,,,, 고생과 고난으로 얼룩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딸에게 얘기해 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이 말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돌아가신 아버지 몫의 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삶의 절반을 가장이라는 역할에 쏟아냈다. 밥벌이를 위해 이른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고 어머니의 삶도 그의 몫이었다. 거처를 제공하며 함께 살았고 어머니의 잔병치레와 간호도 전부 그의 삶에 속했다. 어머니도 아내도 헌신적이고 성실한 그를 태양처럼 바라보았다. 항상 밝게 타오르며 그들을 따뜻하게 비춰주는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변함없는 존재,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런 그가 선택한 마지막 결말은 그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배신이 되었다. 왜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왜? 왜? 왜? 여러 번 되새기고 되물어보아도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애초에 질문을 받아 줄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가 예정된 질문이다. 앞으로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왜 그렇게 된 건지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된다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봉오리 진 꽃들이 매달린 벚꽃나무 아래 한 가족이 있다. 뒤편에 선 그는 출근할 때나 입는 말끔한 양복차림에 어색하지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잔뜩 설렌 표정의 아내도 화려한 메이크업에 한껏 신경 쓴 차림새다. 그 아래로 살짝 겁먹은 듯 얼어있는 딸아이와 장난기가 잔뜩 묻어나는 어린 아들의 앳된 얼굴이 보인다. 딸의 이른 초경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 벚꽃이 한창 피어오르던 봄이었다. 딸에게 살가운 말이나 몸짓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외식을 하자며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때만 해도 외식은 지금처럼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크게 마음을 먹고 한턱을 쏜다는 선언이었다. 외벌이 공직자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리 없었다. 아내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나름의 축하식을 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잔뜩 오므리고 있던 꽃망울과 흩날리던 연분홍 꽃잎이 뒤섞인 가벼운 공기와 무질서하게 오가는 사람들 시끄러운 경적 소리만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를 고향에 내려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깨끗했다. 맑은 날씨 때문에 눈가가 더 흐릿해져서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른 아침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신규자 교육의 마지막 날 퇴소를 앞두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던 때였다.

얼마 전부터 교제를 시작한 남자 친구일 거라 여기고 달뜬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던 동생이었다.

"어... 동동아. 무슨 일이야?" "누나. 아빠가....."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뭐라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못한 질문들은 아직도 허공을 맴돌고 있다. 그는 작은 메모를 남겨두고 새벽에 길을 나섰다. 새벽 달리기를 매일 하는 그였기에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태연하지 않았고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정신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어떻게 숙소를 빠져나오고 콜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던 것 같다.


부정도 각색도 미화도 하지 않겠다. 그날 이후로 가족은 함께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비난과 조소만이 남았다. 아내는 그를 떠올리며 술을 올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를 애초부터 없던 사람으로 지우려고 애썼다. 그의 선택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담겨있다. 그렇게 그들은 강렬한 배신 감속에서 그를 애도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나있는 좁은 길을 알아볼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죽음은 불행의 다른 이름이고 더욱이 내 삶과는 멀찍이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죽음이라는 것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미 그는 그런 선택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었다. 강인했던 그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것 성실했던 그가 그것에 의지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충격이었다. 용기를 낸 선택이 죽음이라니 죽음으로 절망할 만큼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니 나의 우상의 비굴한 결말은 차마 인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누구나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이 있지만 모두가 그 순간을 죽음으로 마무리하지는 않는다. 그의 선택이 그의 나약함이 되고 그들의 나약함으로 증명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를 향한 모든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숨기고 싶었다.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러한 마음을 몰랐다는 것 무관심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도 나를 괴롭혔다. 그가 느꼈을 마지막 순간의 먹먹함과 쓸쓸함마저도 내 것 인 것 마냥 분리되지 못했다. 그와 나눈 어렴풋한 추억에 기대는 것 마저 쉽지 않았다. 그에게 떨어져 나오는 것은 뿌리를 잘라내는 고통이었다. 죄책감이 너무나 거대하고 무거워서 짓눌려있었다.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회피했다. 바쁘게 일을 하고 지내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무엇을 하든 계속 그때로 돌아갔다. 워지지 않을 것을 지워내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그곳을 내내 서성이고 있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 어쩌면 그에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망할 두려움은 발행 앞에서 주저하게 만든다. 이제는 가벼이 될 줄 알았는 데 또 헛짚었다. 이 함정은 깊이가 꽤나 깊은가 보다. 또 빠져버렸다.


"나는 천천히 쓰고 있다. 사실과 선택의 집합에서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씩 아버지만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글의 초안이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생각이 혼자 뛰어다닌다. 반대로 기억의 장면들이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오게 두면, 아버지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보인다. 그의 웃음, 그의 걸음걸이, 그가 내 손을 잡고 장터에 데려가고 나는 놀이기구를 두려워한다. 다른 이들과 나눴던 상황의 모든 조건들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는 매번 개인적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온다. "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신유진 옮김>

<사진출처-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