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해보자

by 황기린

몰타에서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다시 일을 하러 돌아오게 되면서 나는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오기 직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고, 나름 버킷리스트를 작성해서 차근차근해보자고 다짐했었다.


그중 하나가 몰타에서 모델을 해보는 것이었고, 럭키하게도 한 에이전시와 연락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학년에서 가장 큰 아이 었던 나에게는 운동을 하라는 제안도 많이 들어왔었지만 운동신경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왔었다. 그러다가 ‘도전! 슈퍼모델’이라는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는데 단숨에 그 세계로 빠져들었었고, 그때부터 모델이란 마음의 동경으로 늘 조그마하게 품고 있는 숨겨진 꿈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다가 마지막 학기 휴학을 하고 모아둔 돈으로 모델 아카데미에 등록을 했다.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그러나 그때 들었던 소리가 ‘나이가 많아’, ‘체중 좀 더 빼’, ‘필러나 성형을 해 봐’ 하는 자존감,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이야기들 투성이었다.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학생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려고만 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안타깝고, 그 이야기를 듣고 6개월간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거식증, 폭식증을 반복하며 생리까지 중단되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문득 미안한 생각까지 든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10kg이 적었지만 매 번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고, 친구들 앞에서 외모에 대해 비난을 당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져 있었다. 그렇게 온 힘을 다 쏟아부었던 오디션에 떨어지면서 슬프게도 더 이상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의 비난에 지쳐버렸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작은 불씨로 남아있던 마음속 열정을 어쩌면 계속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서 이 작은 섬나라에서 나의 꿈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는 나에게 다이어트를 하라거나, 필러를 맞으라거나, 외모를 가꾸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름답다고, 멋지다고 말해주었다.

여기에서는 일거리가 많은 것도, 모델이 많은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아시안 모델은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코로나로 취소되었던 많은 행사들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는데 감사하게도 작년에는 유일한 아시안 모델로써 몰타 패션위크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뽑자면, 같이 런웨이에 섰던 모델들의 '다양성'이었다. 국적과 나이도 다양했지만 마른 체형의 모델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트랜스젠더 모델도 함께 했었는데 그녀의 자신감에서 풍겨오는 에너지가 무척 인상 깊었다. 그곳에서 다양함의 한 부분으로 참여를 하게 되어서 즐거웠고, 이를 통해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 마치 내가 느꼈던 것처럼.


낯선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지만, 동시에 가슴이 터질 듯 설레었다. 3일 간 매일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에 있는 패션쇼장으로 출근을 하면서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이곳에 머무를지, 어딘가에서 또 도전을 이어나갈지, 아니면 추억으로 남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냥 이때의 기분과 나를 마음에 잘 간직하고 싶다.

(그래도 계속 도전할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