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3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답하려 한 철학자들은 많다. 소피스트들의 인간 중심주의적 인간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아(ego cogitans), 흄의 경험론적 인간학 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 본성을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인간학에 대한 고찰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다만 여러 철학자의 대답이 곧 궁극의 대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결국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바라보는 하나의 가설이자 이해의 방식으로 남는다.
우리가 “좋은 삶을 살았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라고 말할 때, 일반적으로 좋은 삶은 행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행복에 대해서는 많은 철학자들이 고찰해 왔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하려 했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삶의 목적과 행복한 삶을 논하며, 인간의 모든 활동은 행복을 지향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행복은 가장 좋은 것이며 인생 최고의 목적이라는 뜻이 된다. 좋은 삶, 잘 사는 삶, 성공적인 삶, 행복한 삶을 동등한 가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자 하며, 이 지점에서 행복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된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세계는 지극히 나쁜 것이며,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고통과 고난이 삶의 우연적인 특징이 아니라, 삶 곳곳에 만연하며 삶의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사는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 그 자체이고, 욕구와 욕망이라는 역학이 인간을 구조적으로 쉼 없이 분투하게 만든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갈구하며, 산다는 것은 욕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은 부재를 전제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한, 우리는 부재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더 강렬히 욕망할수록 고통은 더 커진다.
그렇다고 욕망하지 않는 것이 실현 가능한 선택지는 아니다. 인간에게 ‘욕망하지 않는 능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특정한 욕망의 부재 역시 나름의 고통을 수반한다. 권태는 존재의 공허함을 마주하게 하여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갈구할 것이 남지 않게 되면, 자기 존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위해, 주의를 돌릴 만한 대상을 찾아 시간을 보내기에 이른다.
칸트는 어떠한 행위의 목적보다 행위의 동기를 중시한다. 이 관점에서 행복은 어떤 의미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고, 칸트는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을 정립하였다.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셋째, 희망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현재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또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누리며 감사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탐내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즉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은 ‘자연적 경향성’과 ‘실천이성’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지닌 존재이다. 여기서 자연적 경향성은 감정, 식욕, 성욕 등 다른 동물들도 갖는 본성을 뜻한다. 자연적 경향성은 대부분의 경우 인간이 착하게 사는 것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처럼 1차원적 쾌락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 경향성에 지배되는 것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실천이성이 존재하며, 이는 도덕적 행동을 판단하고 실천해야겠다는 ‘의지’를 가능하게 하는 이성적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적 경향성을 극복하고 도덕 법칙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이와 함께 선의지의 개념도 정립된다. 칸트는 선의지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자체만으로 선한 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칸트의 기준에서 윤리적 행동은 자연적 경향성이 아니라 선의지를 통한 실천으로 인정된다. 감정이 동기가 되어 실행한 행동은, 도덕적 의무와 일치하더라도 윤리적 가치가 있는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 오직 의무와 도덕법칙에 의해 실천한 행동만이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윤리적인지는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의해 결정된다.
최근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신조어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일 끝나고 와서 먹는 맥주가 행복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논의를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은 어떤 무엇을 소유한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지속적인 활동성을 뜻한다. 그리고 이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계가 중요해진다.
인생은 유한하며 언젠가는 죽음이 온다. 우리는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사실이 공포로 다가오는 순간을 겪는다. 공포가 깊어지면 “삶의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허무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때 허무감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사랑을 통해 위로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라는 것으로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선의지에 의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인간 존엄성의 원칙을 포괄하는 사랑의 가치는 객관적인 윤리 규범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의 태도는 유효하다.
산이 있어야 골이 있듯, 불행이 동반되어야 행복을 정의할 수 있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행복의 기준은 제각각이지만,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행복의 기준’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도 있다. 모두가 그 기준을 넘어서면 과연 모두가 행복할까. 애초에 그 기준은 정립 가능한 것일까. 행복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고통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많은 쾌락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일’이 끝나고 먹는 맥주가 행복한 것이지, 단순히 ‘맥주’를 먹는 행위 자체가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원칙으로 두며, 이때 행복은 총계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행복만을 목적으로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네트워킹을 차단하고 살아간다면, 당장은 자신의 기준에서 행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 사회에서 관계를 절단하고 살아가기는 어려움이 따르며,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결국 도태될 수 있다.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 비교가 발생하고, 삶의 기준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상대론적 기준만을 우선해 살아가면 삶이 피폐해지는 것 또한 당연하다. 끊임없는 비교는 그 기준들이 나 자신을 갉아먹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적절한 절대론적 기준, 그리고 상대론적 기준의 융합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중용은 양적·수적 개념의 ‘중간’이 아니라, 각 상황 속에서 가장 적절하게 행동하는 ‘중용’이다. 앞서 말한 실천이성과 자연적 경향성을 상황에 맞게 중용의 자세로 다루며,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되 타인에 대한 적대심을 피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