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2
현대사회에서 가치 있는 삶은 부 또는 명예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데에 있다고 간주한다. 사람들은 더 좋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성취하려 한다. 하지만 성취를 실현하기 전에 자신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에 대해 객관적이어야 하며, 어떤 마음의 습성을 가졌는지, 어떤 사고방식과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을 파악한 후 현대사회에 적용하여 어떻게 살아갈지 꾸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체이며 동물이다. 인간의 욕망과 관심은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 욕구의 충족이다. 더 나아가 불필요한 간섭 없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다. 또한 현재의 삶이 미래에도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 역시 욕망이다. 욕망의 사회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나만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성찰을 지속해야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렇다면 어떤 삶을 추구해야 아름다운 삶을 구축할 수 있는가? 이는 노동, 예술, 죽음, 사랑의 네 가지 관점에서 고민해볼 수 있다.
노동의 관점에서는 철학자 마르크스가 세운 노동 소외론을 살펴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자신을 의식하는 자기 창조적 활동으로 보았다. 창조적 노동이야말로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진 고유한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동물은 노동하지 않으며, 동물과 비교했을 때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한 본질이 노동이다. 인간은 생활용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동물들과 구분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노동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이 동물과 구분되는 유적 존재로서의 본질이다.
개인들의 특정한 활동 방식은 그들의 삶 각각의 특정한 사고를 통해 관념과 이상을 실현해 나간다. 따라서 노동을 통해 표현하는 자신이 바로 '나'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에 대한 관념이 자본주의하에서 모두 깨어져 버렸다고 생각하였다. 노동이 가진 모든 아름다운 이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이제 노동은 더 이상 자기 발견이나 자기 인식을 주지 못하는 지루하고 허무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노동 소외론의 핵심이다. 생산 수단과 생산력이 분리된 노동은 자신을 실현하는 수단이 아닌, 누군가의 욕망을 대신하여 실행하는 강제된 노동이 되었다.
어느 시대나 계급구조는 항상 존재해 왔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계급의 기준이 모호해졌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수단이 노동력 등과 결합하기 위해 참여해야만 하는 체계의 한 형태다. 산업혁명 전후부터 자본이 계급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그 계급의 기준이 무엇이든 생산계층은 늘 자기 노동의 주체에서 객체로 전락해왔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부분에서 생산계층이 주체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일깨워준다.
4차 산업혁명에서 노동의 개념은 재정립되어야 한다. 현시대의 AI를 살펴보면 인공지능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추가적인 노동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초기 데이터에는 인간의 해석과 생각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인간의 추가적인 노동조차 필요 없게 될 수도 있다. 이때의 문제점은 AI는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AI가 만들어낸 방대한 데이터와 생산물을 누군가는 소비해야 하는데, 인간이 노동하지 않으면 자본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은 기독교적 생각에서 벗어나 나의 능력과 인지적 지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산업은 이러한 과학의 기초를 토대로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낸다. 과학이 산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쾌감, 만족, 유용성과 관련된 인간의 욕망이 해방되었다. 이것이 과학과 결합할 때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자본 축적의 순환으로 연결된다. 산업혁명은 이러한 만족도가 폭발적으로 커질 때 이루어지는데, 이 배경에서 AI 시대가 도래했다.
인공지능이 감정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AI의 한계는 윤리의 영역까지 확장되어 인간과 AI가 공존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윤리의 영역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은 공감 능력에 있기에, 공존의 윤리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로봇의 인간화에 대한 걱정보다는 인간의 로봇화가 더욱 걱정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감정을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사랑이란 관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 흔히 하트를 그린다. 하트는 심장을 시각화한 이미지로, 사랑에 빠지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인간의 정서를 드러내는 기호이다. 하트는 뜨거운 감정이자 설레는 마음을 말한다.
하지만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결단이다"라며 반박하였다. 사랑이 이성적이라는 말을 대중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같은 문제는 대중들이 받아들인 사랑에 대한 개념의 오해에 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또한 감정은 사랑의 일부일 뿐, 사랑이 뜨겁다고 느끼는 감정은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프롬의 관점에서 사람은 동물과 달리 자연과의 단절감을 느낀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로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단독자라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성숙한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상대의 생명과 성장을 보호하고 책임을 가지며 존경하고,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확보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사랑은 객체에서 주체, 즉 자기 자신으로 전환될 때 이루어진다.
사랑은 성과 함께 '최고선'에 대한 탐구가 될 수 있다. 성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철학적 물음이다. 성과 사랑을 다루면서 어떤 것이 더 넓은 의미인지 규정하는 것에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프로이트는 "관계의 목적은 오직 성적 쾌락이며 사랑은 불합리한 감정이다"라며 사랑이 성의 부산물이라 말한다. 반면 에리히 프롬은 성적 쾌락은 사랑에서 주는 자연스러운 선물이라며, 성은 사랑의 부산물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러한 물음들은 결국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가까워진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을 의지의 준칙, 즉 동물과 보편적 입법인 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라 규정한다. 다시 말해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망하는 존재이므로, 성과 사랑에 대입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성과 사랑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신적인 사랑인 '자비'도 동물적 사랑인 '쾌락'도 아닌, 그 중간의 인간만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인간의 사랑이 조화를 통해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위치가 바로 여기다.
인간이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화'의 중요성이 다시금 떠오르게 된다. AI와 인간의 조화, 성과 사랑의 조화와 같이 이러한 조화의 삶에서 '나'에 대한 주체적 삶의 목표를 일깨우는 것이 강조된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을 상기해야 허무함과 공허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1차원적 쾌락에 중독된 말초적이고 본능적인 삶은 삶의 의미를 지속하기 어렵다. 쾌락과 의미의 조화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만들 수 있다.
결과와 성취에 도취되기보다 '과정' 속에 의미를 찾고 이를 지속해 나가는 삶이 진정한 아름다운 삶이라 규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