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6)

by Day One

<해뜰날>(1975) - 송대관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나는 가끔 ‘희망’이라는 말이 싫어진다. 너무 자주 쓰여서, 너무 쉽게 닳아버려서. 특히 누군가가 "힘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떻게?"라고 되묻곤 한다. 힘은 공짜로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어떤 노래는 희망을 다시 믿게 만든다. 송대관의 <해뜰날>은 그런 쪽이다.

이 노래를 알고는 있었다. 그냥 아빠가 부르던 옛날 트로트 정도로. 그런데 이 노래가 진짜로 꽂힌 건 ROAD FC 경기를 볼 때였다. 김상욱 선수가 링 위로 걸어 들어오는데 이 노래가 깔렸다. 조명이 번쩍이고 관중의 소리가 밀려오고 그 와중에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처음엔 웃었다. 격투기 경기에 트로트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들어본 입장곡 중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 같았다. 사람 하나가 들어오며 공기를 바꾸는 장면에 이 노래는 너무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다. 링은 무대가 아니라 생존의 공간이다. 감정은 내려두고 그동안 쌓아왔던 전략싸움이 시작된다.

가사는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단호하다. 슬픔이든 괴로움이든 비켜서라고 말해버리는 쪽이다. 물론 마음이 말 한마디에 비켜서면, 세상에 우울증은 없었을 거다. 그런데도 그 문장이 먹히는 날이 있다. 내가 이미 충분히 괴로워서, 더는 완곡하게 표현할 힘도 없을 때. 그때는 위로보다 명령이 낫다. “ㅈ까고 비켜라.” 짧고 무례해서, 그래서 더 살벌하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결정타는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이 문장이 좋은 건 약속이 예쁘지 않아서다. '언젠가 잘될 거야' 같은 둥근 말이 아니라 날씨처럼 확 바뀌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흐리고 눅눅하던 공기가 어느 순간 칼같이 갈라지는 느낌. "쨍"이라는 의성어는 천둥소리 같기도 하고 햇빛이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어쨌든 조용하지 않다. 희망은 조용히 오지 않는다. 부딪쳐야 생긴다.

그러니까 이건 "잘 될 거야"가 아니라 "바뀔 거야"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원하는 건 성공이 아니라 변화인지도 모른다. 계속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게 지옥이니까. 월요일이 또 월요일이고 화요일이 또 화요일인 삶. 그게 무서운 거다. 달라지지 않는 게 무서운 거다. 그래서 "해 뜰 날"이라는 말이 통한다. 날씨는 바뀌니까. 아무리 흐려도 언젠가는 개니까.

노래 속 화자는 계속 뛰는 몸이라고 말한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뛰는 몸은 멋져 보이지만 사실은 숨이 찬 몸이다. 나는 그 표현이 좋다. '열심히'라는 말 대신 '뛰고 있다'고 말해주니까. 열심히는 마음가짐 같지만 뛰고 있다는 건 현실이다. 땀이 나고 다리가 아프고 심장이 빨리 뛴다. 몸이 먼저 알고 마음은 뒤늦게 따라온다.

이 노래가 무서운 건 포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위로하면서도 툭 던진다. "안 되는 일 없단다." 그 말이 객관적으로 맞느냐고 묻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너무 많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통계를 들이대면 희망은 금방 무너진다. 그런데도 이 가사는 우리가 진짜로 안 되는 일을 말하는 순간을 정확히 찌른다. 사실 그때 우리가 말하는 "안 된다"는 대부분 "오늘은 못 하겠다"에 가깝다는 걸. 오늘을 못 하겠는 마음이 모여서 내일도 못 하겠는 사람이 된다는 걸. 포기는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 작은 "오늘은 안 돼"가 쌓여서 큰 "나는 안 돼"가 된다. 그래서 이 노래는 그 작은 포기를 막는다. 오늘 하나만이라도 비켜서라고 말한다.


이 노래의 구조는 단순하다.

문제를 인정하고("괴로웁지만") 해결책을 제시하고("노력하면은") 결과를 예고한다("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자기계발서 공식과 비슷하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읽고 나면 죄책감이 드는데 이 노래는 듣고 나면 힘이 난다. 차이가 뭘까. 아마도 이 노래는 설득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냥 선언한다. 돌아온단다. 믿든 말든 돌아온단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 노래를 "잘될 때 듣는 노래"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구질구질할 때 꺼낸다. 빨래가 쌓이고 약속을 미루고 자기 혐오가 목에 걸려서 물도 잘 안 넘어갈 때. 출근하기 싫고 사람 만나기 싫고 거울 보기 싫을 때. 그때 틀어두면 신기하게도 대단한 결심이 생기진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행동이 나온다. 컵 하나를 씻고 방을 정리하고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메모라도 써 놓는다. 그 정도면 된다. 해 뜰 날은 큰 이벤트로 오지 않는다. 대개는 아주 작은 정리에서 시작된다. 컵 하나가 개운하면 싱크대 전체가 개운해 보이고 싱크대가 깨끗하면 하루가 조금 나아 보인다. 하루가 나아 보이면 내일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쨍"은 온다.


링 위에서 해는 어떤것일까

김상욱 선수가 링 위로 걸어 들어가며 이 노래를 들었을 때 그는 아마 이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단 걸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링 위에 서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이긴 거다. 나머지 반은 싸우면서 채운다. 그게 "해 뜰 날"이다. 미리 오지 않는다. 링 위에서 만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믿든 말든 일단 오늘을 산다. 해가 뜰지 말지는 모르지만 일단 일어난다. 씻고 밥 먹고 밖으로 나간다. 그게 "뛰고 뛰고 뛰는 몸"이다. 결과는 나중 문제고 일단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정말로 구름이 걷힌다. 산뜻하게 맑은 날이 온다. 그게 노력 때문인지 시간 때문인지 운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왔다는 것이다.


송대관의 해뜰날은

송대관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정말로 해 뜰 날이 온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그냥 믿는 척했을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믿는 척하다 보면 진짜 믿게 되고 진짜 믿다 보면 또 의심이 들고. 그런 식으로 오락가락하면서도 노래는 부른다. 무대에 서면 일단 부른다. 그게 프로다.

송대관 선생님은 2025년 2월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이제는 직접 여쭤볼 수도 없고 무대에서 뵐 수도 없다. 하지만 〈해뜰날〉이라는 노래가 남아서 여전히 누군가의 입장곡이 되고 누군가의 새벽을 깨우고 있다. 1975년에 만들어진 노래가 아직도 통하는 이유는 인생이 아직도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지는 날은 오지만 그 전날은 늘 힘들다. 그건 시대가 바뀌어도 안 바뀐다.


그게 송대관 선생님이 남긴 대답 아닐까. 해 뜰 날은 약속이 아니라 방법이었다는 것.

오늘은 흐릴 수 있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문장 하나로 내일을 조금 빌린다.
쨍-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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