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그런지 부쩍 모임이 잦다. 얼마 전에도 여자들끼리만 모인 자리가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유쾌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예전부터 느끼던 묵직한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우리 여자들은, 특히 결혼한 중년 이상의 여자들은 이렇게 키워진 것일까.
모임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자신의 노동이나 감정이 희생당하는 상황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었다. 남편과 시가, 가끔은 친정 부모의 횡포 앞에서도 습관처럼 합리화를 했다.
"그 사람도 밖에서 일하느라 힘들어서 그래",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나라고 뭐 완벽한가." 스스로를 다독이는 그 말들은 어쩌면 정신 건강을 위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위로하지 않으면 당장 이혼을 하거나 깊은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젊었을 때 일요일 지하철 안에서 본 풍경이다. 다섯 살,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둘을 데리고 가는 젊은 엄마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아이들은 엄마와 놀고 싶어 자꾸 말을 걸었지만, 엄마는 자기만의 괴로움에 빠져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지루해진 아이들이 저희끼리 놀면서도 자꾸만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 아이들의 슬픈 눈망울이 오랫동안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결심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참 많이도 합리화하며 살았다. 결국 그 합리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아이를 지키겠다는 처절한 결심이 있었다.
모임에서 만난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은 서글플 정도로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나무꾼이 선녀에게 아이를 셋 낳기 전에는 날개옷을 주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아이가 생기면 선녀는 더 이상 날개옷을 찾아 하늘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부장 제도는 아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지우는 여성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왔다. 참 똑똑한 여자들이 아이라는 존재에 묶여 본인이 희생당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인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 왔다. 밖에서 눈에 띄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낮게 평가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는 스스로 그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고, 나라는 존재의 고유한 가치를 되찾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당신의 날개옷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당장 아이가 너무 어려서 날개옷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괜찮다. 지금은 아이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당신의 날개옷을 절대 버리지는 마라.
언젠가 아이가 자라 당신의 손을 놓아줄 때, 기쁘게 그 옷을 꺼내 입을 당신을 나는 먼저 걸어가며 기다리고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