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만난 설산과 로마니의 춤
오늘 우연히 TV에서 설산을 보다가 그라나다의 기억이 떠올랐다. 거대한 설산과 알람브라 궁전, 그리고 로마니들의 애절한 춤사위가 서린 그 도시를.
지평선이 이어지던 평원의 나라에서 험준한 산줄기를 몇 번이나 넘어 도착한 그라나다는 입구에서부터 나를 압도했다. 도시의 배경이 되어주던 시에라 네바다 산맥 때문이었다. 스페인어로 '눈 덮인 산맥'을 뜻하는 그 이름처럼, 뜨거운 안달루시아의 태양 아래 마주한 설산은 이름보다 훨씬 경이로웠다.
도시가 산에 기댄 것인지, 산이 도시를 품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산맥은 시내 어디서든 손에 잡힐 듯 가까웠고, 산정의 백색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건축물보다 강렬하게 내 시선을 붙들었다.
맑은 공기 위로 흐르는 이슬람의 색채는 내가 알던 전형적인 스페인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800년 가까이 이곳을 지배했던 무어인의 흔적은 도시 구석구석에 깊게 스며 있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늦게까지 이슬람의 자존심을 지켰던 곳.
그들이 남긴 아라베스크 문양은 이제 기념품 가게의 컵 받침 속에 박제되어 있지만, 여행지에서 데려온 그 작은 소품은 지금도 우리 집 선반 한쪽에 놓여 불쑥불쑥 그라나다의 시원한 바람을 배달해주곤 한다.
설산의 청량한 공기를 머금고 마주한 알람브라 궁전은 또 다른 세계였다. 저 단단한 돌을 어떻게 저토록 정교하고 부드럽게 조각할 수 있었을까. 무어인들이 남긴 미학의 정수를 따라 걷다 보니, 타레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왜 그토록 잘게 쪼개지는 트레몰로 주법으로 만들어졌는지 단번에 알 것 같았다.
벽면에 새겨진 무수한 무늬들이 하나하나의 음표가 되어 선율로 흐르는 듯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밤이었다. 야경 명소인 성 니콜라스 전망대 언덕에 올랐을 때, 우리는 뜻밖에 로마니들의 춤판과 마주쳤다. 기타 한 대의 반주에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는 팔마스 소리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흔히 집시라 불리지만 스스로는 로마니라 부르길 원하는 이 민족을 향해 가이드는 "위험하니 주의하라"라고 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차별의 무게처럼 들려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그 밤 그들이 추던 플라멩코는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꽃 꽂은 머리를 치켜들고 긴치마로 허공을 가르며 바닥을 박차는 몸짓. 날카로운 손뼉 소리와 땅을 부술 듯 내닫는 사파테아도.
국적도 민족도 모를 사람들이 하나둘 그 열기 속으로 뛰어들어 춤판의 경계를 허물었다. 차가운 설산 아래, 그 뜨거운 밤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