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다시 아이가 되다

by 정희

1. 부직포 나무와 불 켜진 반지

크리스마스이브, 줌바 댄스 스튜디오는 거대한 파티장 같았다. 루돌프 머리띠, 산타 복장, 가슴에 커다란 인형을 달고 온 크루들까지. 우리는 '어른'이라는 외투를 잠시 집에 두고 기꺼이 아이가 되기로 했다.


우리 강사는 한술 더 떠 부직포로 만든 트리 옷을 입고 나타났다. 우스꽝스러울 법도 한데, 그 모습이 너무나 당당하고 즐거워 보여 우리 모두는 무장해제되었다.

손가락에는 불이 켜지는 반지를 끼고, 캐럴에 맞춰 대형을 맞추기도 하고 때론 홀로 춤을 뽐내기도 했다.


처음엔 조금 부끄러웠으나 이내 깨달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이처럼 웃는 이 순간이야말로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성탄 선물이라는 것을.


신나게 춤을 춘 뒤에는 제비 뽑기로 선물을 나눠 받았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어린아이처럼 들떴다. 정말 산타에게 깜짝 선물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어진 포토타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시간. 아기 예수의 생신인데 정작 우리가 더 신이 나버린 크리스마스이브였다.


2. 임진강의 속살, 공격과 포용의 지형

오후에는 남편과 임진강 호로고루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갈수기의 강은 평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줄기는 군데군데 끊겨 있었고, 평소엔 숨겨져 있던 강바닥의 자갈들이 강의 속살처럼 드러나 있었다.


우리가 앉은 카페는 절벽 위, 물살이 바깥쪽 벽을 때려 만들어진 공격사면이었다. 반면 강 건너편은 물살이 느려지며 모래와 자갈을 내려놓은 퇴적지형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쪽은 거센 물살을 견디며 단단한 벼랑을 만들고, 한쪽은 모든 것을 품어 안으며 부드러운 평지를 만드는 자연의 조화가 경이로웠다.


3. 용산의 모래사장과 소년의 기억

강줄기를 보던 남편은 불현듯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이 살던 흑석동은 절벽 위 산동네였고, 그 맞은편 용산은 드넓은 퇴적 지형이었다고 했다.

예전 국군의 날이면 그 용산 모래사장을 향해 전투기가 폭격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곤 했는데,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흑석동 산동네에서 가슴을 졸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단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광경이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강하다는 모습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던 시절이었나 보다. 이제는 평화로운 카페에 앉아 마른 강바닥의 자갈을 보며 지형을 논하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이 임진강 물결보다 더 빠르게 느껴졌다.


4. 소란과 고요 사이

돌아오는 길, 해 질 녘 가양대교에서 바라본 한강은 한 폭의 흑백 사진 같았다. 그 무채색의 풍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오전에는 온몸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환영하는 뜨거운 축제를 벌였고, 오후에는 마른 강줄기를 바라보며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다. 꽉 채워 춤췄던 열기도, 물이 끊긴 강을 바라보던 편안함도 모두 내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다. 나의 예순네 번째 크리스마스이브는 그렇게 소란과 고요 사이에서 기분 좋게 저물어 갔다.


내일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찍 일어날 거다. 시청 광장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도 보고, 신세계 백화점의 미디어 파사드도 구경하러 갈 거니까. 벌써 내일이 기다려진다.


이번 크리스마스, 정말이지 참 재미있는 크리스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