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라는 이름의 생존 비용

by 정희

나를 살리기 위한 선택

어린 시절 영화 〈홍도야 울지 마라〉를 보며 나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희생은, 결국 희생을 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모두 피해자로 만든다는 것.

오빠의 성공을 위해 기생의 길을 택했던 홍도는 결국 그 오빠의 손에 체포된다.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는 애달픈 주제곡이 흐르는 그 장면은, 어린 나에게 오래도록 남았다.


그 시절의 사회 분위기는 가혹했다. 특히 맏이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미덕이자 도리였다. 나 역시 그런 가치관에 길들여져 있었다. '나 하나 희생해서 우리 집이 잘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맞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 모두가 불행해질지도 몰라.'


그 목소리와 씨름하던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만약 내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동생들의 뒷바라지만 하게 된다면, 나는 평생 나 자신을 영원한 피해자로 여기며 살게 될 것만 같았다. 동생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깊은 상처를 받고, 끝내 동생과 세상을 원망하며 내 삶을 갉아먹게 될 것이 자명했다.

나 자신을 그런 불행 속에 방치하는 것은 내 영혼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


결국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던 회사를 그만둔 채, 대학 진학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예상대로 주변의 반응은 가혹했다. 친척과 동네 사람들, 부모님의 지인들까지 가세해 나를 손가락질했다.

남동생들의 학비를 대야 할 맏이가 제 살길 찾겠다고 돈벌이를 마다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나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부모님만은 내 편이 되어 주셨다. "동생들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 너는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거라." 부모님의 이 한마디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그 비난의 무게를 끝까지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학교로 향하던 시절,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인 걸까' 하는 죄책감과 외로움이 밀려들 때면 정말 많이 괴로웠다.

'나는 지금 정말 잘 가고 있는 것일까.' 정답 없는 질문을 수없이 되뇌며 나는 나 자신과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그 시절, 1990년대 초 방영된 드라마 〈아들과 딸들〉은 내게 작은 닻이 되어주었다. 딸이라는 이유로 희생의 굴레에 갇혔던 후남이가 그 벽을 뚫고 스스로 성공을 쟁취하는 과정을 보며, 나는 내가 가려는 길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홍도가 희생 끝에 비극으로 걸어 들어갔다면, 후남이는 자기 삶을 붙들고 걸어 나왔다. 나는 후남이의 길을 가고 싶었다.


교직 생활을 마친 지금, 그 시절을 되짚어 본다.

가난한 집안의 맏이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멍에를 내팽개친 나를 이기적인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음을.

그때 내가 나를 구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가족을 원망하며 스스로 말라갔을 것이다.


희생으로 점철된 관계는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분명한 가해자는 없는데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비극. 나는 그 비극의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 선택이 당시 얼마나 많은 비난을 불렀든, 나는 그 덕분에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때의 결정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