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은 활동사진

안개가 걷히고 나면 남는 것들

by 정희

그동안 쓴 글들을 가만히 톺아보니, 마치 한 편의 활동 사진이 상영되는 듯하다. 멈춰 있는 기록이 아니라, 내 생각의 변화가 마치 사진을 이어 붙인 것처럼 선명하게 들어온다.

'아, 이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데.' 나의 소중한 시간과 생각의 변화들이 한눈에 읽히니 참으로 흥미롭다.


글을 쓰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잊힐 수 있는 나의 순간순간을 포착해서 담아 놓으니, 어느덧 커다란 인생 앨범이 되었다. 또한 글을 씀으로써 나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윤곽만 있던 안갯속의 생각이 글을 통해 명료해지기도 한다.

어떤 생각은 시작만 있고 끝이 흐릿하고, 어떤 생각은 결론은 있되 시작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몰라 헤매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도 일단 쓰기 시작하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흐릿한 생각들이 윤곽이 뚜렷하고 모양이 분명한 문장이 되기도 한다. 시작은 있으나 결론이 없던 글에 마침표가 찍히고, 시작점이 보이지 않던 글은 비로소 첫 문장을 찾아낸다.


가끔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고 그것을 나만의 글로 옮기다 보면, 나의 지식이 훨씬 정교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비유를 골라내던 작업이 그랬다.

머릿속의 흐릿한 지도를 선명한 설계도로 바꾸는 일. 글쓰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낼 때, 나는 세상의 지식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자아가 조금씩 형성되는 것을 경험한다. 안개가 걷힌 자리에 남는 것은 명확한 지식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람의 뚜렷한 윤곽이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지점도 있다. 내 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억지로 문장을 짜내고 있거나,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나를 포장하려 할 때 나는 글쓰기를 멈추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명료함이 사라진 자리에 강박만 남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를 단단하게 만들지 못한다.


활동 사진처럼 이어지는 나의 글들을 보며, 나는 어제의 나를 반갑게 마주한다. 그때의 미숙했던 결론도, 지금의 달라진 시선도 모두 소중한 나의 조각들이다.

오늘도 나는 이 커다란 인생 앨범에 한 페이지를 보태며, 어제보다 조금 더 선명해진 나를 인화(印畵)한다.


내일의 나는 또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