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수확 후 기쁨

by 정희

우리 아파트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저층 배수관이 어는 것을 대비해 빨래를 하지 말라는 방송이 계속 나온다. 실제로 몇 년 전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1층 베란다 배수관이 얼어서 물이 넘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올해도 영하의 날씨가 계속된다. 빨래를 하지 말라는 방송이 연일 나오고, 빨래는 거의 2주째 밀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을 옷도 마땅치 않고, 쓸 수 있는 수건도 없어진다. 빨래방에 가는 것도 고려해 보았으나, 무거운 빨래 더미를 들고 빨래방을 오가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온은 영하권이지만 낮 햇살이 좋길래 큰마음먹고 세탁기를 돌렸다.


배수관이 외부로 노출된 것도 아니고 실내에 있는 것인데, 그렇게 쉽게 얼 것 같지는 않았다. 베란다 온도를 확인하니 밖은 영하 2도지만 베란다는 영상 4도 정도였다.


혹시나 사고가 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곧 '에라 모르겠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수습하자'는 배짱이 생겼다.


세탁기를 몇 차례 돌리고 나니 거실 건조대에 빨래가 한가득이다. 마치 농부가 수확을 마친 뒤 곳간에 곡식을 가득 쌓아 놓은 기분이다.


"아이고, 예쁘게 줄을 선 내 빨래 새끼들. 좋은 햇볕 받고 잘 말라라."


내일이면 뽀송뽀송한 수건을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