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위된 왕, 첫째를 위한 변론서

by 정희

나는 2남 2녀인 집안의 장녀이다. 내 바로 밑으로 연년생인 여동생 한 명, 남동생 2명이 있다. 난 어렸을 때 동생들이 너무나 싫었다. 어머니는 동생들이 뭔가를 잘못하면 첫째인 네가 본을 잘못 보여서 그런 것이라며 나만 나무랐다.


동생이 엎지른 물을 닦기도 전에 내 등짝에는 매서운 손바닥이 먼저 날아왔다. 첫째라는 이유는 모든 잘못의 면죄부가 아닌 가중처벌의 이유였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화를 내고 반항을 해도 어머니는 계속 나에게 동생들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웠다.


동생들만 없다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자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나는 큰 아이에게 절대로 모든 책임을 지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그런데 동생들이 늘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터울이 별로 나지 않았기에 친구처럼 재미있게 놀았다. 어느 정도 성인이 된 후에는 밤을 지새우며 철학과 문학, 급변하는 세상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곤 했다. 한두 살 터울로 같은 시대를 공유한 형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간들은 서로의 안목을 넓혀주는 귀한 통로가 되었다.


중년이 되어서는 형제가 많은 것이 정말 좋았다. 경조사나 부모님이 아프실 때 십시일반으로 함께 감당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긴 세월을 거쳐 이제는 서로의 흰머리를 보며 웃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는 것, 같은 부모님과 어린 시절을 공유한 유일한 증인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노년의 큰 위안이 된다.


특히 바로 아래 여동생과는 좀 더 각별하다. 내 글의 많은 것이 여동생과 내가 공유한 기억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의 이런 각별함과는 별개로, 어린 시절의 형제는 나에겐 억울함과 괴로운 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건 동생들의 잘못이 아니다. 형제간의 서열과 책임을 잘못 처리하신 부모님의 잘못이 더 크다. 부모님은 본인들이 아는 지식 안에서 그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 믿으셨겠지만.


알프레드 아들러는 첫째를 '폐위된 왕'이라 불렀다. 부모의 전적인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왕좌에서 밀려난 첫째는 상실감을 겪는다는 것이다. 나에게만큼은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 과한 책임감은 평생 지고 갈 십자가처럼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도 두 아이를 연년생으로 키웠다. 첫째는 딸, 둘째는 아들이다. 둘째가 태어나자 첫째 아이는 엄청 힘들어했다. 동생이 어리다는 이유로 엄마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작은 아이에게 손이 더 많이 갔다. 나는 내가 큰 아이로 자랐기에 첫째가 받는 상처와 외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큰 아이가 슬프거나 외롭게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둘째의 요란한 몸짓에 부모의 시선이 먼저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소란함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이, 묵묵히 견뎌내는 큰 아이의 슬픔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어지곤 한다. 큰 아이가 자신의 자리가 여전히 단단함을 느끼는 순간, '폐위된 왕'은 비로소 동생을 경쟁자가 아닌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이 글을 쓰며 깨닫는다. 나는 여전히 그 어린 시절의 그늘 속에 서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는 그만 나 자신을 그 짐으로부터 놓아주고 싶다. 글쓰기는 나에게, 여전히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달래주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