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5월은 전장이었다

내가 시집가던 날

by 정희

내가 시집가던 날은 5월이었다. 사람들은 ‘5월의 신부’라며 꽃처럼 축복했지만, 내게 결혼은 축제가 아니라 전쟁의 시작이었다. 신혼방에서 먼지 묻은 장롱을 닦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는 친정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나를 묶어버린 듯 답답했다. 그날부터 나는 낯선 집의 이방인이었다.



시댁은 내게 전장이었다. 남편 말고는 내 편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무엇을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요리에 서툰 나에게 처음부터 밥상을 차리라 하셨다. 밥은 겨우 지어도 반찬이 문제였다. 요리책을 붙들고 애써도 돌아오는 건 칭찬이 아니라 꾸지람뿐이었다.


“너는 음식을 많이 배워서 시집가라. 이렇게 간도 못 맞추면 안 된다.”

딸을 훈계하는 척하며 나를 향해 던진 말이었다. 그 말은 화살처럼 꽂혔다. 옆에서 콩나물을 다듬던 시누이가 눈살을 찌푸려도,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남편까지 “식성이 까다롭더니만, 며느리 음식은 군소리 없이 먹는다”라며 나무라셨다. 그때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음식 문제는 견딜 수 있었지만, 육아만큼은 아이의 일생이 달린 문제였다. 나는 어린 시절의 상처는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이를 안아주지 못하게 하셨다. 자주 안아주면 ‘손을 탄다’는 이유였다. 아이가 울어도 버릇이 나빠진다며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으셨다. 그 시절 어머니들에게는 집안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내야 하는 생존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이의 울음은 필요의 신호였다. 그때마다 욕구가 꺾이면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남을 거라 믿었다.



결국 우리는 분가했다. 시어머니는 시이모님까지 불러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단호함으로 집을 나왔다. 그 순간, 오랫동안 눌려 있던 무게가 벗겨지며, 비로소 가볍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과정은 쉽지 않았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같은 성당을 다니셨기에, 성당 할머니들이 어머니께 “딸이 그렇게 나쁘다며? 늙은 부모를 두고 어떻게 분가를 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그들도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요”라며 묵묵히 견디셨다.

성당 가는 길이 고단했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마음이 아려왔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선택은 옳았다. 만약 분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불행해졌을까. 이제 시부모님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긴 싸움이 끝났다는 놓임을 나는 숨길 수 없다. 아이들을 지켜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위안이었다.



시어머니 또한 열여덟 살에 나이 많은 시아버지에게 시집와 전처 자식까지 키우며 모진 세월을 사셨다. 본인이 낳은 큰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한 많은 인생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그 기구한 삶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며느리와 아이들에게 그 모진 마음을 쏟아내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어머니, 그때 저에게 정말 너무하셨어요.”




어머니도 하실 말씀이 많으시겠지만, 저는 제 아이를 지켜냈습니다. 이제는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조용히 보내드리려 합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효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