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낸 시간들
'엄마'라는 이름은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삶이 나에게 건넨 가장 묵직한 선물이었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누군가의 세계가 되었다.
부모님의 딸,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동네 할머니.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역할은 없었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냈을 뿐이다. 그중 '엄마'는 조금 달랐다.
내가 원해서 시작한 여정이었고, 그래서 더 깊이 흔들렸다.
아이가 재수의 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름 없는 죄인이 되었다. 내가 잘 돌봐주지 못해서 아이가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의 표정이 어둡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엄마라는 이름은 때로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내 몫으로 가져오는 가혹한 형벌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들었던 말이 있다. "첫딸은 밑천이다." 그 말속에서 나는 사랑이 아닌 계산을 배웠다.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기대를 짊어졌고, 그 기대는 내 이름보다 먼저 나를 불렀다.
살림의 밑천으로 길러진 내가 내 아이만큼은 결코 그렇게 키우지 않겠노라 했던 다짐은, 역설적이게도 아이와 나를 더 깊은 피로 속에 가두어버렸다. 증명하고 통과해야만 하는 끝없는 관문의 연속이었다.
어릴 땐 손이 많이 가서 힘들고, 학교에 들어가면 학업이 걱정이고, 대학에 가면 취업이 걱정이고, 취업하면 결혼이 걱정이다. 나는 묻고 싶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엄마의 역할일까. 언제쯤 아이의 삶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나는 나름의 기준 하나를 만들었다.
내 기준에서 아이가 진짜 잘못되는 경우는 딱 세 가지다. 마약을 하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 외에는 부모의 기대에 맞지 않을 뿐이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것, 게임을 많이 하는 것, 공부를 잘 못하는 것. 이런 것들은 잘못된 인생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만나는 나쁜 날씨일 뿐이다.
이 기준을 갖고 나서야 나는 조금씩 놓아줄 수 있었다. 잡아주던 그 손을 어느 날 조용히 내려놓는 일. 그 순간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비로소 나의 삶을 다시 시작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놓아주는 연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