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마음껏

나만의 책 읽는 방법

by 애나풀리

내가 늘 가지고 다니는 다이어리의 첫 장은 북리스트로 구성된다.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제목과 저자, 평점을 기록해 둔다. 32개의 칸으로 나뉜 북리스트를 보며 새해 목표를 세웠다. 다 못 채워도 괜찮으니 한 달에 두 권씩이라도 꾸준히 읽자. 하지만 무슨 일인지 11월의 첫날에 마지막 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주 뿌듯했다. 새해 목표를 세울 때면 지겹도록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독서였다. 한 달에 한 권 이상 독서하기. 이것마저도 이루지 못해 연말에는 항상 독서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올해 처음으로 나름의 독서 목표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는 어딜 가나 항상 책을 지니고 다녔다. 외출할 때는 읽던 책을 꼭 챙겼다. 막가방으로 쓰는 커다란 천가방에는 다이어리와 읽던 책을 넣어 다녔는데 솔직히 가볍지는 않았다. 가끔 차를 가지고 이동하지 않을 때에는 더욱 부담이 되었다. 그럼 이렇게 무겁게 책을 가져왔는데 한 페이지라도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진료를 보러 간 병원 대기실에서도, 남편과 데이트를 하러 간 카페에서도, 일하는 라디오 부스 안에서도 손만 뻗으면 책과 닿을 수 있도록 곁에 두었다.


MBTI에서 J성향이 90%에 이를 만큼 철저한 계획형인 나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특히 취약하다. 하지만 나의 성향이 계획적이라고 해서 일상이 계획적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분명 촬영 시간은 2시간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장비 문제로 시간이 붕 떠버리면 대기실로 가 조용히 책을 펼쳤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면 자투리 시간이 많아진다. 흘러보내도 그만인 잉여의 시간들이 생기면 어김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그저 휘발되어 사라지던 시간들이 한 권이 되고, 두 권이 되어 북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두 번째는 관심사의 책을 마음껏 읽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이 당연한 것을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SNS에서 화제가 된 책, 연예인 추천 도서, 그리고 그럴듯하게 보이는 제목들을 보고 책을 골랐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책이라던데 나에겐 잠을 부르는 책들이 많았다. 올해엔 동네에 도서관을 다니면서 도서 검색창에 나의 관심사를 입력했다. 글을 잘 쓰고 싶어 '글쓰기'를,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재테크'를, 나를 알리고 싶어 '브랜딩'을 검색했다. 그중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책을 발견할 때면 그 책을 쓴 작가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기도 했다.


어느 날엔 남편과 심하게 싸우고 친정집으로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남편이 미워 죽겠다며 부모님 앞에서 철없이 울었다. 다음 날이 되자 남편이 슬슬 보고 싶어졌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서로에게 모진 말만 퍼부은 것이 바보같았다. 아버지는 남편에게 나를 데리러 오라고 연락을 하곤, 나에게 책 한 권을 건네주셨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 아버지가 보시기엔 그저 사소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해서 결혼을 해놓고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는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 한동안 나는 '부부 싸움', '결혼'과 같은 주제의 책들 속에 파묻혀 공감하고 위로받았다.


세 번째는 여행지에서 책을 펼쳤다. 오래전에 인터넷에서 한 연예인이 여행지마다 다른 향수를 사용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여행을 향기로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지나 그 향기를 다시 맡게 되면, 그 순간 예전 여행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나에겐 책이 비슷한 의미였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책 속 문장이 절묘하게 어울리기라도 하면, 그 책은 곧 하나의 여행으로 기억되곤 했다. 하다못해 호캉스를 갔을 때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 호텔 침구의 새하얗고 바스락대던 그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남편과 내가 힘든 시기에 일주일간 계획 없이 제주로 떠난 적이 있었다. 마음의 위로가 필요했기에 잔잔히 읽을 수 있는 에세이 두 권을 챙겨갔다. 비가 오는 날에는 숙소 침대에서, 날씨가 좋을 때엔 제주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책에 집중이 안될 만큼 파도 소리가 아주 컸는데 지금도 그 책을 꺼내 읽으면 그때의 파도소리가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의 기억은 시각, 청각, 후각까지 모두 맞물려 있어, 같은 문장을 읽는 행위 하나만으로도 그날의 장면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가방 속 책 한 권이 내 하루의 구석구석을 채워준다.

매거진의 이전글헤맨 만큼 내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