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

2025년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by 애나풀리

12월 중턱에서 올 한 해를 가만히 더듬어보니 어떤 한 단어가 강렬하게 떠올랐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들과 작별하며 매 해마다 마음속으로 점수를 매기곤 했다. 동그라미와 엑스, 간간히 세모로 채점된 시험지에는 도장 같은 점수가 찍혔다. 점수의 기준은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방송을 하고, 어떤 촬영을 경험했는지, 또 얼마나 의미 있는 도전을 하고, 그중 얼마나 이루어냈는지가 그대로 행복의 지수에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2025년이라는 한 장의 시험지에는 점수가 아닌 다른 글자가 찍혔다. '변수'.


정말이지 변화무쌍한 한 해였다. 지나간 시간들은 보통 뽀얀 미화 필터를 입고 수채화 같은 그림이 되곤 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아무리 너그럽게 바라보아도 서걱서걱 질감이 살아있는 유화 같은 시간이었다. 걸음마다 두껍고 질퍽하게 물감이 쌓여 그 자리에 묵직한 흔적을 남겼다. 그중 나의 몸 안팎으로 변수가 날뛰었던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처음 보았던 빨간 두 줄. 너무나 선명하게 임신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늘 먼 미래 어디쯤에 있을 줄 알았던 일이 불쑥 현재로 뛰어들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스마트 워치를 차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내 인생 최고 심박수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청사진 같던 계획이 흔들려 아쉬움이 스쳤지만, 마음에는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결국 계획을 수정하며 이 엄청난 행운을 마음껏 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임신을 하면 누구나 출산까지 이어지는 줄 알았다. 유산은 그저 드라마 속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했다. 아무 이유와 징조도 없이 나의 축복을 앗아갔다. 수술대에서 눈을 감았다 떠보니 나는 다시 홀몸이 되어있었다. 방금 전까진 임산부였는데. 우는 것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걸 그제야 처음 알았다. 나는 고작 5분만 울어도 온몸에 힘이 빠지는 저질체력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5분씩 눈물을 쏟아내며 계획을 또다시 전면 수정했다.


수술을 하고 딱 일주일이 되던 날, 그동안 준비해 온 새로운 도전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달랐기에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하루하루 쌓아나갔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스피치를 가르치고, 밤에는 여전히 라디오 방송을 했다. 나에게 돌격하는 변수를 견디기도 벅찼던 때에 남편에게도 변수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정년까지 보장되던 안정적인 회사에서 작은 실수 하나로 순식간에 직무 해제에 놓인 것이었다. 인원 감축을 예정했던 상황에서 남편은 권고사직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제 발로 나오게 되었다.


결혼 4년 차에 백수 남편을 맞이한 느낌은 새로웠다. 우리는 매일 아침 함께 눈을 뜨고, 모든 끼니를 나누었다. 길어진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남편은 자격증 공부를, 나는 수업 준비를 했다. 배가 출출할 때면 건너편 편의점에 가서 라면과 김밥을 사 먹었다. 대학생 이후 처음 하는 편의점 데이트라며 우리는 속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언제 또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싶은 하루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싶은 하루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갈아가며 밀려왔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고 했던가. 변수의 바람에 휘청대던 우리는 서로에게 태풍의 눈이 되어 이따금씩 평온을 되찾았다. 일상을 뒤흔든 여러 변수들은 결코 나를 무너뜨리려 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화처럼 거칠고 두껍게 남은 흔적을 통해 내 발걸음과 선택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올 한 해가 이렇게 선명히 기억되진 않았을 것이다. 한 치도 예측할 수 없었던 변수들은 나도 몰랐던 나의 힘과 용기를 발견해 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틈틈이, 마음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