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준비하며 남편에게 했던 이기적인 말이 있다.
"올해까지 이직을 할 거고, 만약 못한다면 결혼을 미루고 싶어."
아나운서 일을 계속하고 싶어 방송사만 도전하던 내가 처음으로 꿈을 포기하고 영업직 사원으로 일할 때였다. 내 나이 27살, 남편의 나이는 29살이었다. 결혼을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나는 결혼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도전을 하고 싶다고 했다. 결혼을 하면 나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더 이상 꿈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뭔가 거창하게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원래의 내 자리에서 나다운 모습으로 결혼을 하고 싶었다. 고맙게도 남편은 서운한 기색도 잠시, 응원의 마음만 보태주었다. 다시 아나운서와 쇼호스트 채용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는 없을,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지원한 여러 기업 가운데 사내 쇼호스트에 합격을 했다. 이름이 알려진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아나운서에서 쇼호스트로 방송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흔하지 않은 기회였다. 그리고 여느 직장인처럼 월급날에 일정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정규직 형태가 마음을 참 안정되게 만들었다. 예상보다 빨리 이직에 성공해 버린 탓에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했다. 매일 두 번의 생방송을 하며 방송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달력을 가득 채운 방송들을 보며 부담감에 숨이 막혀올 때도 있었지만, 매일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기도 했다. 숨이 막혀오는 것과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은 꽤 비슷한 기분이었다.
쇼호스트로 일을 배우며 방송에 익숙해지기 시작할 즈음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유부녀가 되니 상품에 대해 할 말들은 더욱 많아졌다. 주부들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고, 결혼 생활의 사소한 경험들이 방송에서는 생생한 에피소드가 되었다. 매일의 방송과 일정한 월급은 나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기에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 안정은 얼마 못 가, 또다시 커다란 불안과 맞닥뜨렸다. 내가 정말 마지막으로 이를 곳이 이 회사일까? 이곳에서 쇼호스트 일을 오래 하더라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내 안에서의 대답은 점점 커져만 갔다. 아니라고, 정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도전을 하고 싶다고. 지금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용기 내어 변할 수 있는 생명 같은 것은 반대로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토록 안정적이고 싶었으면서, 안정을 찾고서는 또 다른 불안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5년 만에 아나운서 학원에 문을 두드렸다. 평범했던 대학생은 아나운서가 됐지만, 여전히 더 나은 아나운서를 꿈꾸며 다시 그곳을 찾았다. 학원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상담 때 물어볼 질문 리스트를 꺼내보며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디서, 어떤 방송을 해왔고, 어떤 마음 가짐으로 방송 준비를 할 수 있는지 자세히 이야기했다. 상담이라는 형태를 띠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나에게 얼마 큼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증명해 내야 하는 시험 같기도 했다. 상담을 마치니 선생님이 궁금한 게 없냐고 물으셨다.
"사실 제가 최근에 결혼을 했는데... 괜찮을까요?"
용기 내서 상담하러 온 궁극적인 이유였다. 질문과 동시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출 생각을 안 했고, 처음 보는 선생님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무슨 이유였을까. 혹 내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가능성이 없는 사람으로 비칠까 봐, 그게 무서웠던 걸까? 안간힘을 다해 큰 호흡으로 겨우 눈물을 멈추자 선생님은 차분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우리 우선은... 최대한 잘 숨겨봐요!"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방송 채용 시장에서 이점이 될 부분은 아니기에 합격을 할 때까지는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혼을 결심한 순간부터 이 모든 상황을 예상했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 마주한 두려움은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결국 결혼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것이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며, 한편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들어갈 땐 무언가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안고서였는데, 나올 때는 타고 남은 재만 날리는 듯 헛헛한 마음뿐이었다. 그동안 스스로를 괴롭혀온 고민의 끝에서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