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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Feb 15. 2023

모르는 꼬마가 누나라고 불러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파트 공동현관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바로 앞에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꼬마가 먼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꼬마 덕에 저는 현관을 프리패스해서 들어왔어요.


모름지기 지성인이라면 건물 내에서 서로에게 지켜야 할 거리가 있잖아요?


너무 가까이 붙어서 가면 좀 수상하고 불편하니까요.


그래서 저도 배운 어른답게 한 두 걸음의 거리를 두고 꼬마를 뒤따라 엘리베이터로 갔습니다.






먼저 들어간 꼬마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겠지 싶었는데 아무 버튼에도 불이 들어와 있지 않더라고요.


(내 마음의 소리) '원래 애들은 항상 자기가 버튼을 누르고 싶어 하는데...'


제게 양보한 건가(?) 하는 마음에 버튼을 눌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럴 수가.


엘리베이터 문 위쪽에 층수를 나타내는 전광판에 아무런 숫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윽. 11층까지 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고장 났나 봐."


"진짜요?"


"어. 에휴. 11층까지 가야 되는데.. 나는 계단으로 가야겠다."


저의 계획을 알리는 발화가 아니라, 엘베가 고장 난 것 같으니 너도 같이 올라가려면 따라와라, 하는 심산으로 한 방백과도 같은 말이었죠.


꼬마는 기약도 없이 수리를 기다리느니 저와 함께 계단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했나 봐요.


뒤따라 오길래 계단으로 통하는 문이 닫히지 않게 잡아주고 기다렸습니다.







꼬마와 대화를 나누며 올랐던 계단.



"나는 11층 가는데 너는 몇 층까지 가야 돼?"


"저는 18층이요."


"와. 나보다 엄청 높이 가네. 괜찮겠어?"


"네, 하나도 안 어려워요. 완전 쉬워요."


"오~ 운동 많이 하나 본데? 너 태권도도 다니니?"


보통 그 또래 아이들은 태권도를 많이 다니니까 물어봤어요.


"오와!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면 알지~ 무슨 띠야?"


"저 노란띠예요."


"지금 태권도 다녀오는 길이야?"


"아니요, 피아노 학원 갔다 왔어요. 이제 집에 가서 좀 있다가 태권도 가요."



제가 미취학 아동이랑 말을 잘하는 편이거든요.


친구 아들이랑 같이 만나도 친구보다 친구 아들이랑 더 정신 수준이 맞아서 티키타카를 잘해요.


그래서 이 계단 동지 꼬마와도 이야기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혼자 올랐으면 외롭고 또 힘들었을 계단이, 꼬마 덕분에 오를만해서 고마운 마음도 컸어요.


또 반대로 생각해서 제가 없었다면 꼬마 혼자 계단으로 갔어야 했을 텐데, 혹시 무섭거나 할까 봐 제가 함께 있어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어찌 되었건 아무래도 좋은, 그런 계단 오르기였어요.


"아.. 이제 너무 힘들다. 몇 층이지 지금?"


쳇바퀴처럼 같은 모양으로 뱅글뱅글 계단을 돌며 오르다 보니 이제 슬슬 다리는 후들거리고 숨이 턱턱 차기 시작했어요.


그나마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가 사라져서 마스크를 코만 살짝 내리고 숨을 쉬면서 올랐습니다.


이제 6층이라니.


체력이라고 부르기에도 참 거시기한 있는 듯 없는 듯 한 힘을 짜내면서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계단을 탔습니다.


"아.. 나 너무 힘들다. 넌 안 힘들어?"


"네. 제가 누나보다 더 튼튼해요." 


(내 마음의 소리) 음? 꼬마야,
너 지금 뭐라고 한 거니?
누나보다 더 튼튼하다고?
훗. 어머. 얘..
내가 마스크 끼고 있어서 얼굴을 자세히 못 봐서 그런 거니?
호호호. 어쩜 좋아.
내 친구들 지금 결혼하고 아기 있는 애들이 수두룩한데...
내가 너 이모 뻘인데 누나라고 불러주다니..
너 크게 될 애다. 사회생활 잘하겠네~~


사실 20대 때는 지나가던 꼬마가 언니라고 하든 이모라고 하든 아무 상관이 없었거든요?


와 근데 이제 저도 나이를 먹었나 보더라고요.


꼬마한테 순간 누나라는 말을 들으니까 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


내가 이런 거에 이 정도로 기뻐하는 사람이었나, 싶어서 약간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인데 어떡해요.


누나 소리를 들으니까 가쁘던 숨도 하나도 안 힘들어지고, 너덜거렸던 다리도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듯이 가볍게 솟아올랐습니다.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진짜? 그래~ 그런 것 같네~~ 네가 누나보다 훨씬 튼튼해 보여~~ ^^"


"맞아요. 제가 훨씬 튼튼해요. 왜냐면 누나는 편식하잖아요."


"편식? 무슨 편식?"


"누나는 야채 안 좋아해요. 저는 야채도 잘 먹고 편식 안 하고 김치도 잘 먹어요."


(내 마음의 소리) 나 편식 안 하는데...?
야채 많이 먹는.....
아.........
나 말고... 너네 누나.... 말하는 거구나........



대화를 하며 오르니 어느새 11층에 도착했습니다.



"김치도 잘 먹는구나~~ 그래~~ 이제

아줌마는

11층 다 와서 먼저 갈게 ^^~~ 조심히 올라가~~ 안녕~~~"



태권도를 다녀서 그런지 아주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서 인사한 꼬마는 아줌마를 뒤로 하고 18층을 향해 떠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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