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리를 할 때 남편은 옆에 착 붙어 보조를 해준다. 깻잎, 상추, 토마토 같은 재료 씻기와 주걱, 샐러드볼, 집게 같은 주방도구 설거지를 주로 담당한다. 내가 맡긴 일을 다 끝내면 항상 묻는다.
"이제 나 뭐 해?"
요리를 하고 있다가 질문을 받으면 바로 뭘 시켜야 할지 생각이 잘 안 난다. 며칠 전 집에서 양갈비를 구워 먹었던 날에도 질문하는 남편에게 좀 기다리라며 짜증을 부렸나 보다.
"알겠어, 알겠어. 화내지 말고 말해."
화도 짜증도 낼 일이 아닌데 내가 왜 그랬을까? 그래도 남편은 속 좋게 화내지 말라고 말해준다.
애꿎게 잘만 구워지는 양갈비.
#02. 놀러 가기
나는 갈대 할아버지다. 마음이 하루에 열두 번이 아니라 한 시간에 열두 번은 바뀌기 때문이다. 주말에 무엇을 먹을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놀 지 정할 때 마음이 시시각각 변한다.
"이번 토요일에 서울랜드 가자!"
"그래."
----- 30분 후 -----
"아니다, 그냥 민속촌 가자."
"좋지~"
"갈 때 맛집 들러서 먹고 갈까?"
"그러자."
"아니다. 시간 애매할 거 같으니까 맥도날드 드라이브 쓰루 포장하자."
"응."
----- 당일 아침, 맥도날드 거의 도착 -----
"드라이브 쓰루로 포장으로 가줘."
"알겠어."
(5초 후) "아니다, 드라이브가 줄 더 길어 보인다. 그냥 주차하고 직접 들어가서 포장하자!"
"오키~"
----- 포장하고 민속촌 주차하며 -----
"민속촌 안에서 외부음식 먹어도 되나? 그냥 주차하고 차에서 먹고 갈까?"
"그러지 뭐."
"아니다, 전화로 물어볼게."
(전화중)
"외부음식 반입된대!! 들어가서 먹자."
"오 그래? 좋네."
결국 민속촌 안에서 먹은 맥도날드.
이렇게 내가 계획을 수시로 바꿔도 남편은 짜증 한 번 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나는 계획을 꼼꼼히 짜서 어디서 무얼 하든 최대의 효용을 뽑아내는 것을 좋아한다. 같은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어도 차에서 보다는 경치 좋고 운치 있는 민속촌 안에서 먹는 게 좋다. 휴일이라 어차피 서두를 것도 없지만 길어 보이는 자동차 줄을 서느니 주차하고 직접 매장 안에서 키오스크 주문하기를 택한다.
여행할 때도 유명하다고 하는 곳들, 맛있는 식당들, 포토스팟들 모두 염두에 두고 최적의 경로를 구성해 시간대 맞게 딱딱 이동하는 것! 너무나도 가슴이 벅차게 좋다. 식당 브레이크 타임 피해서 저녁 타임 오픈런하고, 남들 몰리는 시간대 피해서 사진 잘 나오는 곳 가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에 큰 만족과 안정을 느끼는 타입이다.
반면 남편은 계획은 잘 세우지 않는다. 타고난 천성도 그러하지만, 어디서 무얼 하든 언제 뭘 먹든 그냥 나랑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좋으니까 계획이 어떻든 아무 상관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닐 수도 있음.)무던함이 교양과목이라면 대학교 다닐 시절에 두 번은 수강했을 텐데. 남편의 이런 무던함이 부럽고 고맙다.
#03. 투정 부리기
어른이 된다고 투정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보는 눈이 많아지니까 억지로 참는다. 전셋집 벽지 곰팡이를 주인이 안 갈아 준다고 하거나, 핸드폰 버스카드가 갑자기 안 찍히는데 현금도 카드 실물도 없는 날처럼 살면서 억울한 일도 있고 맘처럼 안 돼서 짜증이 날 때도 정말 많다.
위에서도 말했듯 나는 계획을 짜고 그 틀 안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말하면 계획이 틀어졌을 때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남들이 봤을 때 별 것도 아닌 일에도 크게 기분이 상한다. 오늘 저녁으론 꼭 꼬막비빔밥이 먹고 싶은데 반경 10km 내에는 파는 식당이 없다든지, 인터넷 쇼핑을 하다 주문하려는 검은색 와이드 팬츠가 딱 내 사이즈인 M만 없어서 재입고를 3일 더 기다려야 한다든지. 물론 어느 누구에게나 유쾌한 경험은 아니겠지만 나의 경우 도가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때마다 남편에게 열변을 토한다. 내가 어제 유튜브에서 우연히 알고리즘 때문에 눈에 띈 꼬막비빔밥 먹방 영상을 봐서 계속 먹고 싶은데 우리 집 근처엔 파는 곳이 없다, 그걸 먹으려면 10km 이상을 운전해서 나가야 한다, 2시간 동안 인터넷 쇼핑해서 겨우 맘에 드는 옷 찾았는데 딱 내 사이즈만 또 없다, 하면서 딱총새처럼 나의 설움을 내뱉는다.
"그랬어~ 지금 당장 차키 챙겨서 꼬막 비빔밥 먹으러 가자. 옷은 어쩔 수 없으니 기다렸다가 재입고되면 2개 사. 아니 3개 사. 맘에 드는 건 많이 사둬."
남편에게 쏟아내고 나면 남편은 밤이든 새벽이든 해결할 수 있으면 당장 해결해 주려고 한다. 당장의 해결책이 없으면 이성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해 준다. 보통은 이렇게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진정이 된다. 꼬막 비빔밥을 먹으러 새벽 1시에 나서는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 꼬막비빔밥을 당장 입에 넣는 것을 원했다기보다, 남편의 '둥가둥가'를 바랐던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뾰족한 송곳인 내가 푹신한 겨울이불 같은 남편의 품에서는 날세우지 않고 얌전히 진정할 수 있다.
이불이랑 결혼한 송곳이 오랜 시간 지나면, 똑같은 이불은 못 되더라도 무딘 송곳은 될 수 있지 않나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