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한 에어팟이 아닌 한물 간 넥밴드 블루투스 이어폰이라서, 지금 쓰는 텀블러는 유행 지난 패턴이라서, 손잡이에 OO 야유회 기념이라고 쓰인 우산은 왠지 부끄러우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힙'하고 '센스'있고 '디자인이 예쁜' 새로운 물건을 사야 해.
'힙'하지 않다는 이유로 낭비하고 있진 않습니까?
별로 안 이쁜 민둥민둥한 스뎅같은 제 텀블러입니다. 쓴지 꽤 된건데 겉모습은 이래도 시원함 유지는 최고입니다.
2021년 4월 19일, 핸드폰을 바꾸었습니다. 갤럭시 S9을 쓰다가 S20을 샀습니다. 고장 나거나 싫증 나서 바꾼 것은 아니고 엄마가 쓰던 폰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새로 사 드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기능을 많이 안 쓴다며 제가 쓰던 S9을 달라고 하시고 저더러 새 폰을 사라고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최신형 핸드폰을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최신 모델이 나오면 그 직전에 나왔던 모델을 중고로 삽니다. 중고로 A+급 휴대폰을 사면 63만 원 정도 합니다. 최신 모델의 거의 절반 가격입니다. 요금제도 알뜰 통신사 요금제를 씁니다. 전에는 3대 통신사를 이용했었는데 지금 알뜰 통신사와 비교해 봐도 아무런 품질 차이가 없습니다.
알뜰 요금제는 데이터 20G+음성 200분+문자 100건짜리를 18,810원에 이용하는데, 제휴 신용카드로 11,000원 할인받아서 결국 7천 원대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에 3대 통신사를 쓸 때는 비슷한 조건을 거의 7만 원 주고 사용했는데 말이에요. 거의 10배 가격인 셈이죠. 아무튼 저는 이렇게 나름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절약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데이터는 전산상 10G로 나오지만 프로모션으로 10G+10G 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주 저렴한 요금제!
근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설명하자면 좀 깁니다. S20 모델을 사고 몇 주 후, 친구와 신도림에서 만나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핸드폰 넷플릭스 어플에서 예능 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을 '오프라인 저장' 하였습니다. 긴 지하철 여정에서 보려고요. 그러고 이어폰을 찾아들고 지하철로 향했습니다. 서있는 동안에는 웹툰을 보다가, 다행히 자리가 금방 나서 앉은 후에 드디어 이어폰을 꺼내 넷플릭스 예능을 보려고 했습니다.
'어? 이어폰 꼽는 구멍이 어딨지?'
휴대폰 동서남북 앞면 뒷면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어폰 구멍이 없는 겁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S20부터는 동그란 이어폰 구멍은 없고 휴대폰 충전 잭에 딱 맞는 모양(C타입)으로 생긴 이어폰이 기본 제공된다고 합니다. 저는 중고로 핸드폰 본체만 구매한 터라 기본 제공 이어폰이 없었고요. 이어폰은 있는데 연결할 구멍이 없다니. 바야흐로 무선의 시대입니다. 하릴없이 넷플릭스는 보지 못 하고 웹툰이나 인터넷 서핑 따위로 시간을 때우며 약속 장소에 갔다가 돌아온 기억이 납니다.
그 후에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출퇴근은 차로 하니까 블루투스 연결해서 들으니 상관없지만, 가끔 이렇게 약속 장소에 가느라 지하철을 오래 탈 때는 어쩌나. 넷플릭스를 보거나 음악을 듣고 싶은데, 새로운 무선 이어폰을 사야 하는 걸까. 일 년에 대여섯 번 쓰자고 21만 원짜리 에어 팟을 사는 게 맞는 걸까. 에어팟 보다 저렴한 중국산 이미테이션 '차이팟'은 3만 원 주면 살 수 있던데, 그걸 사는 건 괜찮은 걸까.
왼쪽 에어팟, 오른쪽 차이팟.
저는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돈을 절약하고자 하는 마음이 물론 컸고요. 둘째로는 지구가 걱정돼서 입니다. 저는 소극적 환경보호 쟁이입니다. 남들처럼 거창한 환경 운동을 하지는 못합니다. 카페에 갈 때 매번 텀블러를 가져갈 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나마 컵홀더(슬리브)는 항상 안 끼웁니다. 아깝잖아요. 내 손에 물 조금 묻는 게 뭐 대수라고 종이를 한 번 쓰고 버린다는 게. 택배로 오는 아이스팩을 모아서 다시 쇼핑몰에 보내줄 만큼 적극적이진 않지만, 동네 정육점에 고기 사러 갈 때 가져다 드립니다. 그럼 정육점 사장님도 좋고, 나도 쓰레기 봉지 값 줄일 수 있어서 좋잖아요.
깨끗이 씻어 물기를 말리고 있는 아이스팩. 정육점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지하철에서 넷플릭스 안 보면 죽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몇 번 덜 지루하게 가자고 집에 있는 동그란 유선 이어폰을 두고 새 이어폰을 사는 게 아직은 시기상조 같았어요. 나중에 정말 필요해지면 살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안 사고 싶어서 마음을 접었습니다. 썩는데 300년 걸리는 전자 쓰레기를 추가로 만들지 않은 셈이지요. 그러다 문득 5년 전쯤 유행했었던 넥밴드 블루투스 이어폰이 생각났습니다. 택배 기사님들이나 퀵 기사님들이 많이 썼고 일반 직장인들에게도 큰 붐이 일어나서 제 친구들도 가지고 있던 제품이었어요. 저는 당시 다니던 식품 회사에서 코레일과 협업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코레일 로고가 박힌 제품을 기념으로 받았었습니다.
재생/일시정지 버튼 옆에 코레일 로고가 있습니다.
우리 집 컴퓨터방 흰색 서랍장 3번째 칸은 핸드폰 칸입니다. 각종 이어폰, 충전기, 타입별 충전 잭 등이 들어있습니다. 그곳을 뒤져보니 역시! 하얀색 코레일 이어폰을 찾았습니다. 사용하지 않은지 벌써 3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기특하게도 방전되지 않고 바로 전원이 켜지더라고요. 그러고서 제 핸드폰의 블루투스를 켰습니다.
"블루투스 연결이 완료되었습니다"
노장이 오랜 시간 때를 기다렸다가 단칼에 임무를 수행하듯, 넥밴드 블루투스 이어폰은 여전히 자기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음성과 반짝이는 램프로 알려왔습니다. 이어폰을 찾은 그 날, 1시간 걷기 운동을 나갈때 함께했습니다.
앞으로 지하철로 긴 여행을 할 때 두렵지 않습니다. 남들처럼 쌈빡한 콩나물 모양의 에어팟이 아니지만, 강낭콩 모양의 갤럭시 버즈도 아니지만, 요즘 쓰는 C타입 충전기도 아닌 구식 5핀 충전기로 충전을 해서 써야 하지만. 코레일 로고가 박혀있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넥밴드 블루투스 이어폰은 제 귀에도, 그리고 제 마음에도 바른 소리를 들려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