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세 번째 이야기
나는 한때 예쁜 가정을 꿈꿨다.
따뜻한 집, 잘 자란 아이들,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남편의 든든한 뒷모습.
그 꿈을 믿었기에 전업주부라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마음속에 그려두었던 그림과 달랐다.
나는 점점 작아졌고,
무능하다는 생각이 마음 한쪽에 눌어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내 선택이 틀렸다고,
아니 그 길을 끝까지 버텨낼 힘이
내게는 없다고 믿게 됐다.
‘무가치한 사람.’
그 말이
어느 순간부터 내 이름처럼 나를 대신했다.
거울을 보아도,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미워했다.
꿈을 믿었던 나를,
그 사람을 믿었던 나를,
그 결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있는 나 자신을.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
베란다로 나갔다.
늘 내려다보던 풍경인데
그 거리감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여기서 멈추면 어떨까.’
생각은 번개처럼 스쳤지만
묘하게 고요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도, 엄마도 떠오르지 않았다.
슬픔도 눈물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멈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며
나도 모르게 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서늘했지만 맑았고,
어디선가 막 피어난 잎사귀 같은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바람 속에서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 깊은 곳까지 차오르는 공기가
오랫동안 굳어 있던 감정을
조금씩 흔드는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었다.
그때,
단단히 얼어붙어 있던 마음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틈 사이로
바람이,
빛이,
숨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나는 발을 내딛지 않았다.
대신, 마음을 바람에 맡겼다.
난간 너머로 펼쳐진 하늘은 유난히 파랬다.
저렇게 맑은 색이
여전히 세상 위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붙들었다.
뺨에 남은 냉기를 느끼며
나는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서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