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남편과 산다는 건

예순여덟 번째 이야기

by 달빛여우



그 작은 변화는 생각보다 깊은 곳을 건드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멈춰 있던 삶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어쩌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조심스러운 문장이

어느 날 문득 마음 한가운데 내려앉았다.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한 무게로.


이력서를 쓰는 동안 손끝이 자주 멈췄다.


‘경력단절’이라는 네 글자가 마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경력란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마치 내가 비어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래,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기대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마음으로

몇 군데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계약직 자리를 얻었다.


기쁨보다 먼저 스며든 건 걱정이었다.


아직 어린 둘째를 종일반에 보내야 했다.


말이 또래보다 늦은 아이.

낯가림도 있는 아이를

하루 종일 타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을 짓눌렀다.


‘조금 더 크고 난 뒤에 시작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이 선택이 내 욕심에서 비롯된 건 아닐지

뒤늦은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평소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요즘 엄마들은 다 그렇게 산다고.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도 아이를 잘만 키운다고.


그 조용한 압박에 난 늘 숨이 조여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망설임 끝에

나는 그 흐름에 발을 들여놓기로 했다.


확신에 찬 선택은 아니었다.


다만,

나도 한 번은 해보자고.


두려움과 미안함 사이에서

아주 작게 고개를 드는 용기를 붙잡았다.


아이들이 잠든 저녁,

늦게 귀가한 남편에게 취업 소식을 전했다.


고작 계약직일 뿐인데도,

그 말을 꺼내면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보고 싶으면 해 봐.”


쉽고 가벼운 허락이었다.


나는 그 말이 왜인지 모르게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몇 가지는 함께 조율해야 할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순간,

그는 내 말을 자르듯 덧붙였다.


“대신,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마.”


그 한 문장에

마음에서 조그맣게 타오르던 불씨가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내가 요즘 얼마나 바쁜지 말했잖아.”


조금 전까지 기대와 설렘으로 따뜻했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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