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아홉 번째 이야기
“대신,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마.”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곱씹을수록 속이 비틀렸다.
그의 말속에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집안일은 여전히 내 몫이라는 것.
아이들은 여전히 내 책임이라는 것.
그러니까 내가 일을 시작하면,
그 위에 ‘일’을 하나 더 얹는 것뿐이라는 것.
결국 그에게 집은,
퇴근 후 돌아와 편히 쉬는 곳이어야 하고
나에게 집은,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
자기는 여기까지, 너는 거기까지.
넘지 말라는 표시처럼.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나를 맞벌이하는 사람들과 곧잘 비교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은 늘 나를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일을 하겠다고 하자,
그는 슬그머니 발을 뺐다.
노골적으로 말리진 않았으나,
대신 ‘선택은 네가 한 거다.’라는 얼굴로
모든 책임에서 도망쳤다.
그 비겁한 태도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왜 항상 내가 더 감당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왜 그의 일상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간 뒤의 장면이 너무도 선명했다.
잠든 아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언성을 높일 그의 모습.
조용하던 집 안을 단번에 갈라놓을 날 선 말들.
“내가 언제 너보고 일하라고 했냐?”
“왜 없는 말을 지어내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냐?”
“애들이랑 집안일에 소홀할 거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그 말들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 입에서 나온 한 마디로,
싸움의 모든 원인이 내가 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터질 것 같던 감정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내가 일을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힘들게 하려고 일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을 더하는 순간,
나는 ‘부탁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도움을 구하고,
양해를 구하고,
허락을 기다리는.
다시 그 위치에 서고 싶지 않았다.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와 동등한 사람으로 서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속으로 삼킨 채, 방을 나섰다.
침묵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