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남편과 산다는 건

일흔 번째 이야기

by 달빛여우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이 먼저 떠졌다.

휴대폰 화면에 4:47이 찍혀 있었다.


그 불빛 때문인지, 옆에서 아이가 한 번 뒤척였다.

나는 조심히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집 안은 아직 어둡고 조용했다.

아이들 숨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


맨발에 닿는 바닥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 덕분에, 오늘이 출근 첫날이라는 사실이 또렷하게 실감 났다.


부엌 불을 켜자 희미한 불빛이 번졌다.

매일 서 있던 자리인데도 그날은 조금 낯설었다.


잠시 멈춰 서 있다가, 이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이들 아침을 준비하고,

첫째가 돌아와 먹을 간식을 챙겼다.


저녁에 허둥대지 않으려고

반찬도 조금 만들어두었다.


기름이 달궈지는 소리,

밥이 끓는 소리,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


탁, 탁, 탁.


그 규칙적인 울림이 고요한 새벽을 흔들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는 여태까지도 혼자서 해왔다고.


도움 없이도 버텨왔고,

결국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이 또한, 결국 내가 해내면 되는 일이라고.


그렇게 다짐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 것 같았다.


집을 나서며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오랜만에 걷는 출근길은 묘하게 어색했다.

익숙했던 길인데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회사 건물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장은 몸에 맞았지만,

표정은 아직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두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분명 알고 있던 단축키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순간,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괜한 선택이었나.’


그 생각은 퇴근길까지 따라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자 괜히 미안해졌다.


혹시 내가 우리 집의 균형을 흔든 건 아닐까,

내 욕심 때문에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아침은 다시 왔고,

나는 또 일어났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새벽은 이르고 몸은 무거웠지만,

출근길에 오르는 일은 조금씩 익숙해졌다.


작은 일이라도 끝내고 나면 다음 일을 하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혹시 놓친 건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봤다.

사소한 실수라도 줄이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듯 쌓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어? 이거 생각보다 빨리 했네요.”


팀장님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적응 빠른데요. 잘했어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별일 아닌데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 나 아직 할 수 있구나.'


그 생각에 숨이 한 박자 늦게, 깊게 들어왔다.


대단한 성과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저 오늘 맡은 일을 끝냈다는 것.

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해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하루를 더하고 또 더하면서,

나는 조금씩 그 자리에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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