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남편과 산다는 건

일흔일곱 번째 이야기

by 달빛여우



그동안 나는

나를 위해서도,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혼만은 피하고 싶었다.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말을 내뱉는 순간 알았다.

내가 정말로 이혼을 원한다는 것을.


남편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질문은 너무 단순했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오래된 상처를 건드렸다.


내 안에는 수년 동안 쌓여온 이유들이 있었다.


남편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

홀로 짊어진 책임,

끝없는 피로.


그 모든 것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의 한마디는

그 시간을 너무도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정말 모르는 걸까.


내게 그와의 결혼생활은

죄를 알지 못한 채

지옥에 떨어진 듯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정말로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되묻고 싶었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녕 모르냐.’고


그러나 그 말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끝내 지켜내지 못한

가정에 대한 아쉬움마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상대의 마음에는 관심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


그 앞에서 나는 더 분명히 깨달았다.


여기서 더 살아봐야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랑도,

존중도,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그 깨달음은 슬프기보다 차갑고,

아프기보다 명확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차분히 말했다.


그의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으로 인해

내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


말을 이어가는 동안,

내 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조차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듣듯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당신과는 그만 살고 싶어.”


말을 마치자,

가슴 깊숙이 묵혀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처음이었다.

남편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것은.


내내 바라던 일이

이혼을 앞두고서야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내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그곳을 떠나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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