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여덟 번째 이야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노느라 그랬냐?
밖에서 힘들게 벌어다 준 돈으로 살면서
그게 할 소리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 말, 참 많이도 들었다.
상황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이제는 화가 난다기보다
그저 지겹고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가능한 한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안 놀았어.
살림하고 애들 키우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살았어.”
말을 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이 말이 이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릴 거라는 걸.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남편은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그게 논 거지.
남편이 꼬박꼬박 월급 가져다주니까
세상이 만만하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어딘가가 툭, 내려앉았다.
그제야 분명해졌다.
'이 사람과는 끝까지 말이 통하지 않겠구나.'
내가 아무리 내 마음을 설명해도
내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말해도
그에게는 결국 같은 말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향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난 이혼하기로 이미 결정했어.”
말을 하면서도
생각보다 마음이 고요했다.
“번복할 생각도 없어.
그러니까 이 집 팔아서 나눴으면 해.”
남편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결국 내가 예상했던 말을 했다.
“이혼하려거든 애들 데리고 그냥 나가.
여긴 내 집이니까.”
역시나.
이 말도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놀랍지도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나온 시간들이 조용히 떠올랐다.
남편과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로 채워지던 하루들.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긴 밤을 혼자 지새우던 순간들.
아이들이 모두 잠든 뒤에야
겨우 허리를 펴고 깊게 숨을 내쉴 수 있었던
그 늦은 밤의 고요까지.
그 시간들은 내게
늘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들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흘러가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저 집에서 시간을 때우는 일일 뿐이었다.
별것 아닌 일.
누구나 하는 일.
그래서 결국 그 시간들은
이 사람의 기억 속에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가볍게 지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