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남편과 산다는 건

여든한 번째 이야기

by 달빛여우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삶과 시간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 곁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숨이 조금은 트였다.


오래 헤매던 길의 끝에

겨우 도착한 사람처럼,


저 앞 어딘가에서

자유가 손짓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남아 있었다.


엄마에게 말해야 했다.

이혼한다고.


그 말을 꺼내는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단단히 조여왔다.


며칠을 망설였다.


입술 끝까지 올라온 말은

번번이 다시 가라앉았다.


엄마는 어떻게 반응할까.


분명 걱정할 것이다.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가야 할 딸의 앞날을.


혹여 반대하면 어쩌지.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말하면 어쩌지.


엄마 얼굴 위로 지나갈 감정들을 상상할수록

내 결심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는

어떤 말이 돌아와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이미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망설였다.


이제는 못 참겠다고,

엄마 옆에서 살고 싶다고,

아이처럼 매달리듯 말해볼까.


같은 생각을 수없이 반복하는 사이

시간은 조용히 흘러가 버렸다.


어느 날,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집 안이 고요해졌다.


불을 낮춘 거실에서

나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들려온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막내이모였다.


순간 머릿속이 멈칫했다.


서울에 사는 이모가

지방에 있는 엄마 전화를 받는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 짧은 정적 사이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번졌다.


그리고 이모의 한 문장이

모든 것을 멈춰 세웠다.


“네 엄마, 병원에 입원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심장은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이혼을 결심한 마음과

엄마의 입원 소식이

같은 순간에 나를 덮쳐왔다.


서로 다른 무게의 돌이

한꺼번에 가슴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스치듯

아주 불길한 예감이 지나갔다.


어쩌면

내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하필 지금일까.

그 질문이 가슴 안쪽을 거칠게 두드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이 빠져나갔다.


버티고 있던 마음의 근육이

한순간에 풀려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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