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남편과 산다는 건

여든일곱 번째 이야기

by 달빛여우



이혼하자는 말을 꺼낸 뒤,

남편은 조금 달라진 듯했다.


엄마에게도 꽤나 정성을 들이는 모습이 보였다.


위급한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나 역시 감정적으로

그에게 기댔던 날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은 샤워를 하러 들어가며

양복을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갔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그 주머니를 정리했다.


그때,

구겨진 종이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영수증이었다.


카페 이름.

주문 내역.

그리고 시간.


별생각 없이 보다가

시선이 그대로 멈췄다.


엄마가 수술실에 들어가던 바로 그 시각,

남편은 카페에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그날 나는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의자 위에서

두 손을 꼭 쥔 채

그저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불안했다.


그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짧은 말이었다.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고,

특별할 것 없는 위로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말 하나에 마음을 기댔다.


정말 괜찮을 거라고,

잘 끝날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기도했다.


엄마를 살려달라고.

제발, 무사히 나오게 해달라고.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들린 영수증 속 시간은

그 모든 순간을

아무렇지 않게 뒤집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보통의 남자들이 고르지 않을 음료 한 잔.


그의 취향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시각, 그 자리에서

그가 다른 여자와 마주 앉아 있었을 장면이.


물론, 상대가 누구든

회사에서 동료와 차를 마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빠를 허망하게 보내고

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엄마마저 그렇게 잃을까 봐

내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그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적어도 그 전화 한 통 뒤만큼은,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는

나와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카페에 앉아

다른 사람과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이 사람이 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 버렸다.


웃음이 났다.


이혼까지 결심해 놓고도,

그가 조금 달라졌다는 이유로

그 말 몇 마디에 기대고 있었던 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영수증을 다시 접어 넣었다.


그리고

내 안의 감정 역시 덮었다.


엄마가 나으면,

어차피 남이 될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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