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남편과 산다는 건

여든아홉 번째 이야기

by 달빛여우



항암치료를 마치고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보다 마음이 먼저 풀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앉아 있던 날이었다.


첫째는 학교에,

둘째는 유치원에 있을 시간.


현관문이 뜬금없이 열렸다.


남편이었다.


늘 밤에야 들어오던 사람이

밝은 시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어색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이유를 묻기도 전에

이미 좋지 않은 쪽으로

짐작이 기울고 있었다.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늘 듣던 음악도 없었고,

신호에 멈춰 설 때마다

짧게 숨을 고르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침묵이,

말보다 먼저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병원이었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의 시선이 우리 사이를 스쳤다가

곧장 남편에게 머물렀다.


“아직 마흔도 안 되셨는데

고혈압에 당뇨, 고지혈증까지 있습니다.

수치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건조한 문장들이 이어졌지만

결론은 분명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것.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서른여덟.

젊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나이가

그날, 처음으로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들은 있었지만

지금 꺼내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늦은 밤마다 술 냄새를 묻혀 들어오던 사람,

아이들보다 피곤함을 먼저 내세우던 사람,

내 걱정을 잔소리로 밀어내던 사람.


그 모든 장면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하루는 이미 끝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주 미묘하게,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던 서재에

사람의 기척이 머물고,


아이들의 말에 짧게라도 대답하는 목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평일 저녁,

가족 모두가 식탁에 마주 앉는 일이

이렇게 낯설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런 저녁이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어른들은 말했다.

남자는 몸이 아파야

집으로 돌아온다고.


흘려듣던 말이었는데,

결국 우리 집에서도

틀리지 않았다.


그 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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