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남편과 산다는 건

아흔 번째 이야기

by 달빛여우



병원에서 효과가 좋은 신약이 나왔다고 했다.


엄마는 기대에 부풀었으나,

신약으로 인해 심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은

몸과 마음이 동시에 부서지는 일이었다.


그날이 유독 그랬다.


엄마보다

내가 먼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불 꺼진 거실 한가운데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이 흠칫 놀라 물었다.


“왜 그래?”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에 알아버린 탓인지,

말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속 얘기를 털어놓듯이.


“도망치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도움 없이도

나는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무력감이

조각처럼 꼬리를 물고 올라왔다.


남편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렇게 힘들어?”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걸 지금 와서 묻느냐는 듯,

허탈한 웃음이 얼굴을 스쳤다.


힘들다는 말은 이미

내 몸과 표정, 숨결 곳곳에

조각처럼 새겨져 있었는데,

그에게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그럼, 이제부터는 내가 도와줄게.”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놀람과 눈물이 뒤섞여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이건 내가 알던 남편의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이 진심인지,

얼마나 오래 지켜질 약속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그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막혔던 숨이

트이는 듯

숨이 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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