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여덟 번째 이야기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쌓여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
아니, 끝내 이해하지 않으려는 얼굴.
그게 더 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조금 더 길게, 깊게.
그리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만해.”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만큼 분명하게 울렸다.
“뭘 그만해?”
그는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맏며느리 얘기.”
잠시 흐르던 정적이
그의 대답으로 끊어졌다.
“틀린 말 아니잖아.”
“그래도 지금 나한테 할 말은 아니야.”
그의 표정이 굳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어?”
말을 꺼내는 순간 목이 잠깐 막혔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나한테
그 얘기를 하고 있어?”
그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해야 할 건 해야지.”
그 말이 떨어지자,
나는 더 받아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느슨해졌다가도
어느 순간 숨을 조여 오는 그것.
나는 알고 있었다.
결혼생활 내내
보이지 않는 목줄을 차고 있었다는 걸.
이제 와서야 그 사실을
또렷하게 인정하게 된 것뿐이다.
나는 맏며느리가 되고 싶어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나로서,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슬플 때 기대고,
기쁠 때 함께 웃는
평범한 삶을 바랐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내가 아니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맏며느리로서
채워야 할 자리와 역할 뿐이었다.
그 사이에서
내 감정은 늘 뒤로 밀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지나쳐온 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이
갑자기 또렷한 윤곽을 가지고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그만하라고.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생각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결론이었다.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그게 무슨 소리야?”
남편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원래 그러기로 했잖아.”
내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