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현실에 발을 딛다
기대와는 달리 흘러갔던 대면수업.
당연할 수밖에 없었던 인과의 흐름 속에서 결국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춥디 추운 겨울이었지만, 나는 갈 데 없어 방구석에만 있었기 때문에 몸은 따뜻했다.
바깥보다 더 시리도록 추운 것은 결국 나의 마음속이었다.
아무런 울타리도 없이 허허벌판이었던 내 마음.
온갖 매체들로 나의 마음을 채우려 했지만, 바닷물처럼 점점 더 갈증이 날 뿐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 속 세상에 빠져있을 때는 즐겁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올 때 느껴지는 괴리감.
이 괴리감이 점점 깊어질수록, 현실의 나는 아무런 존재도 아닌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정말 망가질 것 같았고, 아무런 성취도 못한 채 대학을 졸업할 것 같았다.
이러려고 내가 열심히 편입을 준비한 게 아닌데.. 이대로 졸업을 해버리면 내 20대의 모든 날들이 부정할 것 같은 느낌. 이 섬뜩함이 결국, 나를 공허의 구렁텅이서 끄집어내었다.
4학년을 앞둔 공대생이 해야 할 것들은 정말 많았지만, 방학때 할 만한 것들은 자격증 공부였다.
아직 친한 사람이 1명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혼자 할 수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처음 시작한 것은 컴활 1급 필기 공부였다.
한국사 1급은 이미 취득했었고, 어학도 편입 준비를 하면서 취득한 점수가 있기에 할 건 없었다.
막연하게 공공기관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기에, 그 당시 제일 만만한 게 컴활 1급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시 잡고, 1급 필기 책을 펼치니 알쏭달쏭한 내용이 가득 펼쳐졌다.
이걸 왜 공부해야 하나? 싶은 내용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학과 공부보다는 당연히 할 만했다.
꼭 따야 하는 자격증이기도 했기에 동기부여도 충분했던 나는 4일 정도 벼락치기를 하여 필기를 합격했다.
실기가 더 중요한 시험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합격"이라는 성취의 기쁨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긴 충분했다. 바로 컴활 1급을 공부하려 했지만, 컴활 1급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자격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공대생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격증인 기사 자격증이었다.
4학년이 되면 응시 자격이 주어지기에, 나는 주저 없이 기사 시험에 올인하기로 했다.
3월 초에 필기시험이 예정되어 있었어서, 1달 반 정도 남은 1월 중순부터 하면 충분할 것 같았다.
지금 자격증을 다 취득한 내 입장에서는, 컴활 1급 실기를 3주 만에 끝내고 기사 필기도 3주 만에 끝내는 계획을 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쨌든, 현실에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나는 가상현실에서 조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루의 절반은 필기 공부를 하고, 나머지 절반은 다시 게임이나 만화의 세상에 빠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많이 나아진 것이었다.
현실세계에 다시 되돌아오면서 혼잣말도 현저히 줄었으니.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와 게임, 만화를 나름대로 밸런스 있게 조절해 가며 착실하게 살았다.
물론, 이 밸런스는 조금씩 무너져가긴 했다.
당연히 게임과 만화 쪽으로..
한심해 보일까 봐 조금의 변명을 하자면, 기사 자격증 필기 공부가 하다 보니 조금 여유가 있었다.
필기 책 분량이 1000page가 넘다 보니 겁을 좀 먹었었는데, 기출반복을 하다 보니 그렇게까지 어려운 과목은 아니었다.
게다가, 편입공부할 때 이미 한 번 봤었던 과목이었기에 좀 더 여유가 있기도 했고.
1달 반의 시간은 너무 충분했던 시간이었기에, 사실 이때 컴활 1급도 같이 병행했으면 안성맞춤이었겠지만..
나는 편입 이후에 공부 습관을 다시 좀 잃어버린 상태라 게임에 또 빠져들었다.
공부, 만화, 게임의 비율이 3 : 3: 4 정도의 비율이었던 거 같다.
그래도 하루에 3 ~ 4시간 정도는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 다시 공부 습관을 잡아나갔다.
공부 시간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공부를 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우울감을 극복해 냈다.
만화나 게임으로 완전히 빠져버렸다면, 나는 더욱 깊은 구렁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간신히 한쪽 발은 현실세계에 디뎌둔 덕분에, 나는 가상 세계에 빠져 살면서도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진 않았다.
이렇게 한 달 정도를 살다 보니, 나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면서도 다시 내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게임도, 만화도 충분할 만큼 즐겨서 더 이상 많은 시간을 쏟지도 않게 되었다.
2월의 중순.
기사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 되자,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기사 공부에 쏟아부으며 현실로 완전히 되돌아왔다. 다시 마음을 회복하여 현실로 완전히 복귀한 나에게, 운명도 조그만 선물을 주었다.
기사 필기시험은 3월 초에 잡혀 있었기에, 나는 다가오는 개강의 설렘과 즐거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방학 때 어느 정도 공부를 해두긴 했지만,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공부량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월 말에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며 정신없이 살고 있었다.
안 하려던 공부를 오랜만에 하루 종일 하니 많이 힘들고 괴로웠지만, 현실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 자신을 보며 뿌듯하기도 했다.
문제는 생활비였다.
간신히 다시 공부할 마음을 잡았고, 공부에 매진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4학년을 알차게 보낼 계획을 나름대로 잡았는데, 이러려면 아르바이트에 거의 시간을 안 뺏기면서 타이트하게 살아야 했다. 아쉽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는 필수였다.
정 안되면 4월부터 집 근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던 그때, 난데없이 전화가 울렸다.
051-xxx-xxxx의 전화번호는 조금 생소했다.
친구도 다 없어진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기껏해야 070이나 02로 시작하는 스팸 전화들이었다.
부산의 지역번호인 051은 생소했던 터라, 혹시 부동산 쪽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혹시, XXX학생 맞으신가요? XXX학과 사무실인데"
내가 다니던 학과의 사무실 전화번호였다.
"아, 네 맞습니다. 혹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수강신청도 다 해두었고, 등록금도 장학금으로 해결해 둔 터라 학과에서 딱히 신경 쓸만한 일은 없었다.
혹시 뭔가 잘못을 했나 싶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응답한 나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혹시, 학과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할 수 있나 싶어서 전화했는데, 가능하니? 개강 전에 한 번 사무실에 방문해 줄 수 있을까?"
"아.. 네! 가능합니다."
믿을 수 없었다.
성적은 중위권 정도였던 내가, 어떻게 학과 사무실에 근로할 수 있는 거지?
나는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학과사무실에 방문하여 근로조건을 듣고 나니, 이전 대학과 비슷했다.
최저시급이거나, 최저시급보다 조금 더 쳐주는 근로조건이었고, 학과사무실 옆 컴퓨터실에서 대기하다가 일이 있을 때만 와서 도와주는 형식.
특이한 것은, 다른 학과 학생들 몇 명도 우리 학과에서 같이 근무를 하는 것이었다.
5명 정도였던 우리는 학과 조교님들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듣고,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돌아오는 발걸음은 너무나 가볍고 즐거웠다.
생활비도 해결할 수 있고, 근무를 하면서도 시간을 뺏기지 않고 공부가 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같이 근무하는 학생들은 나랑 동갑인 남자 둘과 동생 3명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친해질 수도 있겠지.
완전히 현실로 복귀한 나는 공부에 박차를 가했고, 3월 초의 기사 필기시험도 무난하게 합격하였다.
힘차게 시작한 4학년 1학기.
다시 치열하게 살았던 이 시기에, 나는 내 20대 통틀어서 가장 알찬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