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20대 중 가장 알찼던 1년
졸업을 앞둔 4학년 1학기.
남들은 미리 수업을 들어 꽤나 여유 있는 4학년을 보낼 때, 나는 21학점 가량의 수업을 듣는다고 바빴다.
2학기 때 좀 더 여유롭게 취업준비를 하기 위해, 1학기때 수업을 왕창 들어놓기로 계획을 세웠기 때문.
8개의 과목을 신청하고, 기사 시험 하나까지 준비하는 일정은 생각 이상으로 바빴다.
3월 초의 기사 필기시험은 무난하게 합격했으나, 문제는 실기 시험이었다.
100% 주관식으로 이루어진 실기 시험은 공부 양이 방대했는데, 하필 중간고사 시험 일정과 딱 겹쳐버렸다.
8개의 과목에서 쏟아지는 과제와 기사 실기시험 준비는 나를 현실로 돌리는 걸 넘어서 일말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근로장학이 아니라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를 했다면 이 스케줄을 절대로 소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학과 근로장학은 내 전적대와 마찬가지로 업무가 거의 없어 근무시간에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근로장학을 하며 공부하다가 6시가 넘으면 학교 도서관이나 집에 와서 남은 과제나 기사공부까지 하는 일정.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강의를 듣지 않을 뿐, 남은 과제와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있어야 했다.
시험기간이 아닌 도서관은 한적했다.
몇몇 수험생들로 보이는 사람들만이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었다.
아마, 대학원생이나 고시생들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 무리에 섞여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니, 이른바 '갓생'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뿌듯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공부 따위 내팽개치고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과 게임만 하던 내가 맞나 싶었다.
그렇게, 공부와 과제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기사 실기 시험까지 같이 쳐야 하는 중간고사는 거대한 벽과 같았다.
사실, 이때쯤에는 이미 공공기관으로 취업을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서 학과의 중간고사보다는 기사 실기 시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긴 했다.
공공기관은 어차피 블라인드 채용 때문에 학점은 기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기엔 양심에 찔리는 이 애매한 마음속에서, 내 공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진행되었다. 애매한 공부만큼, 중간고사도 결국 애매하게 치렀다. 편입 첫 해보다는 좀 나아진 거 같긴 하지만 잘 친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 쳐서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 애매함으로 중간고사를 끝냈다. 문제는 기사 실기 시험이었다.
중간고사와 병행하면서 준비하기도 했고, 첫 기사 실기 시험이었기에 부족함이 많았던 공부.
중간고사가 다 끝난 주의 일요일 오전에 잡힌 시험.
남들은 봄을 만끽할 때, 나는 마지막 남은 체력을 끌어모아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그 당시의 나는 이 기사 실기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차라리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더라도 꼭 합격하고 싶었다.
편입 후에 변변찮은 공부실력으로 자신감을 잃은 나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바로 기사 시험 합격이었기 때문. 중간고사가 끝나고 남은 이틀 동안 정신없이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새 일요일 오전이 밝아왔다.
기사 시험을 치르러 온 연령대는 꽤나 다양했다.
나 같은 대학생들이 가장 많았지만, 직장인들이나 중장년층 분들도 많았다.
각자 필기구를 꺼내서 열심히 본인만의 노트를 보는 모습은 필기시험과는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이윽고, 감독관의 안내에 따라 노트를 집어넣고 시험지를 배부받았다.
나는 시험지의 파손 여부를 확인하면서 빠르게 문제를 스캔했다.
이때쯤, 대부분의 응시생들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이번 시험.. 난이도가 정말 장난 아니라는 것을!
평소보다 훨씬 어려운 난이도임이 분명했다.
문제를 풀어도 좋다는 안내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페이지를 넘겼지만,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문제지를 넘기는 소리만 팔랑팔랑 들려올 뿐이었다.
나도 그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기출에서 나오지 않았던 문제들이 많이 나와서, 일단 아는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공부했던 기출문제들은 분명 이 정도 난이도는 아니었는데..
18 ~ 20문제 중에서 내가 확실하게 풀 수 있었던 것은 10문제뿐이었다.
합격점수가 60점인 이 시험에서, 내가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점수는 기껏해야 45점 정도였다.
남은 10문제 중에서 어떻게든 부분점수를 받아야 했는데, 그때 시험 시간의 절반이 지났고 퇴실해도 좋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방송이 나오자마자, 응시생의 80% 이상이 그대로 일어나더니 시험지를 제출하고 휙 나가버렸다.
어차피, 계속 있어봤자 더 풀 수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기사 시험도 결국은 기출문제 반복풀이로 공부하다 보니, 풀 수 없는 문제가 나오면 그냥 백지상태로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나고 싶은 내 삐뚤어진 자존감은 이 시험을 그대로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풀었던 문제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못 풀겠는 문제는 아무 글이라도 적었다.
단 1점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그럴듯한 말들을 적고 계산과정을 적었다.
결국 채점은, 채점위원이 주관적으로 판단할 테니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으면 1점이라도 주지 않을까?라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고심하면서 모든 문제지들을 결국 다 채웠더니, 어느 순간 나 혼자만 시험장에 남아있었다.
총 3시간이 주어지는 시험시간에 2시간 30분 넘어서까지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감독관의 눈치를 살피며(물론, 감독관은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시험지를 제출했다.
마음에 드는 답안지는 아니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나는 미련 없이 시험장을 나왔다.
중간고사와 기사 시험이 끝나고, 진정한 휴식이 찾아왔다.
2월부터 3개월 동안 쉴 새 없이 달려왔으니 조금은 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5월이 다 되어가는 날은 이미 초여름의 분위기였다.
매미가 울지는 않지만, 날씨가 서서히 무더워지면서 햇빛이 쨍쨍해지는 느낌.
코로나로 인해 여전히 5인 이상 집합금지였지만, 하늘은 맑았다.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딘 채, 바라보는 하늘은 꽤나 감격스러웠다.
나는 외로움에 무너져 그대로 폐인이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는 생각보다 강인한 사람이었다.
현실로 완전히 복귀한 나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게 있다면 근로장학생들과 친해지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저 서먹서먹하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 해야 할 공부만 했기에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나는 이대로, 편하게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내 편입생활은 말 그대로, 편입한 것 자체와 몇몇 자격증을 취득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나?
내 청춘은 정말 이렇게 삭막하기만 해야 할까?
여기서 좀 더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욕심인가?
나의 이 욕망에 운명은 답해주었다.
그 정도는 욕심이 아니라고.
5월 초의 한산했던 어느 날.
학과사무실의 조교님이 한 가지 제안을 해주셨다.
여기 있는 근로장학생들끼리 공모전에 응모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안 그래도, 취업을 대비해서 공모전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관심 있던 참이었다.
나는 바로 수락하고 같은 근로장학생들한테 말해서 바로 팀을 꾸렸다.
다들 하고 싶은 의욕이 많았기에 진행은 순조로웠지만, 문제는 일정이었다.
중간고사도 끝나고 다들 한가로운 시기였지만, 공모전 마감은 2주밖에 남지 않았어서 우리는 빠르게 주제를 탐색하고 보고서를 써 내려가야 했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우리는 결국 밤까지 회의하고 자료조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대학생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열정과 과제로 단련된 정신으로 우리는 꾸준히 보고서를 완성해 나갔다.
겨우 3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드는데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지만, 결국 완성하여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하게 만든 보고서는 그만큼 자료나 내용이 부실했는지 장려상조차도 받지 못했다.
사실 좀 아쉬웠다.
장려상을 받은 보고서를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우리랑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 우리의 눈보다 심사위원의 눈이 더 정확했음을 이제는 알지만.
하지만, 그 당시엔 정말 아까운 차이로 공모전 입상을 못한 거 같아서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확실하게 얻은 것은 하나 있었다.
단순히,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경험이 늘어난 게 아니라 팀원끼리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같이 밥도 먹고 사적인 얘기도 했던 결과,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공모전이 끝나고도 우리는 같이 밥도 먹고 도서관도 다니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모전 제출이 끝나고 나니, 금세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와서 또 열심히 공부해야 했는데 이번의 공부는 좀 달랐다.
나는 이제껏 항상 혼자 집에서 공부하거나 도서관 구석에 박혀 공부했는데, 이제는 내 옆에 다른 친구가 앉아있었다. 동갑내기 친구와 같이 공부하면서 중간중간 바람을 쐬며 쉬기도 했다.
같은 학과 친구에게는 공부 자료들을 이것저것 받아서 좀 더 효율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다른 학과 동생이랑은 타 학과 건물에 숨어 들어서 새벽 3시까지 밤샘 공부를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타는 동생이었기에, 나를 뒤에 태우고 내 자취방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분명, 공부도 공부지만 친구나 동생들과 떠드는 시간이 더 많았던 거 같은데 성적은 좀 더 좋게 나왔다.
나는 4학년 1학기 동안 21학점 + 기사 시험 + 공모전 응모라는 일정을 소화했는데, 공모전 빼고는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성적은 3.7점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고, 기사 실기는 60점 턱걸이로 합격하면서 기사 자격증 하나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1학기를 만족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많은 학점을 소화한 결과, 2학기에 들을 수업은 2 ~ 3개 남짓이었다. 근로장학도 조교님이 나를 좋게 봐주셨는지, 2학기에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여름방학부터 졸업까지 약 8개월 간의 시기동안 주어지는 마지막 대학생활.
여유로운 강의 일정과 업무 강도가 지극히 낮은 근로장학 덕분에, 꽤나 유유자적하게 대학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이 남은 시기동안, 기사 자격증 2개를 더 취득하고 공모전 하나를 더 응모하면서 성공적으로 대학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