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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화. 삭막했던 나의 대학생활을 끝마치며..

회색으로 가득했던 나의 청춘.

by Nos

열심히 살았던 1학기 덕분이었을까?

이번의 여름방학은 작년과 달리 그렇게 무력하게 보내진 않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서 또 하나의 기사 필기시험을 합격했던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기사 실기 시험을 또 준비해야 했다.

휴식 없이 시작된 공부 스케줄은 조금 힘들기는 했다.

하지만, 원래 나는 여름을 싫어하기도 했고 어차피 같이 놀러 갈 사람도 없었으니 딱히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 실기를 공부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알찬 여름방학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무더운 여름은 역시나 기승을 부렸지만, 나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별다른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살면서 아끼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에어컨 전기세였어서 오히려 냉방병을 조심해야 했다.

에어컨을 틀고 이불을 덮는 사치를 부리는 것이 내가 여름에 즐기는 유일한 사치였다.


하지만, 역시 가장 기분 좋은 사치는 바로 도서관의 에어컨을 마음껏 이용하는 것이었다.

에어컨을 튼 원룸은 모든 게 만족스러웠지만, 좁기도 하고 외로운 내 마음을 달래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럴 때마다, 도서관에 자주 들러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여름방학에도 학교 도서관에 나와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고시생이나 수험생처럼 보이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그 두 부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어정쩡한 취업준비생이었지만, 내 남루한 옷차림은 그들과 구분되진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도서관보다는 대학 밖으로 나가서 청춘을 만끽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청춘의 모습이긴 하지만.. 내 20대의 대부분은 결국 도서관에서 마무리되는 거 같아 좀 씁쓸했다.

도서관에서 대부분을 보낸 거 치고는 결과물이 시원찮은 건 더더욱.


그래서, 더욱 절박하게 매달렸다.

남들이 볼 때 별 거 없는 기사 자격증 하나였지만, 이 별 거 없는 것 하나도 떨어지면 나는 더더욱 별 거 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았기에.

지금은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릴만한 기사 시험이 아니었음을 안다.

기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다른 활동도 하며 좀 더 청춘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또 안다.

그저, 지금의 내가 봤을 때 그 당시의 내가 좀 안쓰러울 뿐이다.


여름방학의 나에게 보이는 단 하나의 길은 기사 시험뿐이었기에, 나는 다시 한번 사력을 다해서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지 시험날은 금세 다가왔다.

이번에도 실기 시험은 어렵게 나왔지만, 나는 무난하게 70점을 넘기며 합격할 수 있었다.

전공 공부를 가장 많이 한 대학 4학년 + 시간 여유가 가장 많은 여름방학 때의 시험이었으니, 난이도가 좀 어려웠어도 떨어지는 게 이상했다.


합격 발표는 8월 말에 나왔지만, 시험을 친 7월 중순부터 합격을 확신했다.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순탄하게 나는 내 분야의 메인 자격증 두 개를 전부 취득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성과였으나,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현실 세계에 복귀하긴 했지만, 나의 삐뚤어진 자존감과 공허한 마음은 기사 자격증만이 해결해 줄 거라 믿었기에. 나는 쉬지 않고 다음 기사자격증을 준비하게 되었고, 공공기관 인적성시험인 NCS도 준비하게 되었다.


나의 이런 학업적 욕심은 다시 나를 도서관에 박히게 했다.

솔직히 이제 좀 지긋지긋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변변찮은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게 공부뿐이었으니.(누가 보면 서울대 수석인 줄 알겠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도서관이나 집에만 있었던 나에게는 더위를 느낄 틈이 없었다.

빠듯한 시험일정 때문에 거의 고시생처럼 생활을 했더니 여름방학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어디 놀러 가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여름방학이 아쉬웠으나, 자격증을 취득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2학기에는 6학점만 수강하니까 여름방학 못지않은 여유로운 스케줄이기도 했다.

방학보다는 약간 할 일이 생겼지만, 일주일에 2일만 3시간씩 강의를 듣고 오는 주간스케줄은 여유로웠다.

나는 남은 기사 자격증 공부와 함께, 공공기관 NCS를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근로장학 때 친해진 친구들은, 2학기때는 함께하지 못했기에 자주 만나지 못했다.


시험기간에 가끔씩 만나, 같이 공부를 하곤 했지만 1학기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아쉽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괜찮았다.

성큼 다가온 졸업과 그 뒤에 따라오는 취업이 무서웠던 나는 공부에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으로 취업하기로 결심한 나는 학과 공부에도 거의 손을 뗐다.

과목을 2개만 수강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대학과 학점도 적지 않는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이었기에 학점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내가 목숨을 걸려는 것은 3번째 기사자격증 시험이었다.

여유로운 2학기 일정이었고, 학과 공부도 거의 하지 않던 나에게는 이번 시험도 불합격하면 창피한 것이었다.

그래도, 앞에서 친 두 개의 자격증보다는 쉬운 난이도이기도 했고 넉넉한 일정 덕분에 공부 시간을 많이 확보하여 나는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12월에 나는 드디어, 3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학과에서 3개의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같이 근로장학을 했던 과탑 친구와 함께 단 둘 뿐이었다.

하나도 취득하지 않은 학생들도 많았고 두 개 정도 취득한 친구들도 소수뿐이었기에 나름 뿌듯했다.

학점으로는 중간등수였지만 스펙으로는 차석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12월까지 열심히 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남은 기말고사도 마저 치고 나니 학교생활이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기사 자격증 하나에 너무 정신이 팔렸는지 내 1년이 순식간에 지나간 기분이었다.

이대로, 2월까지 조금 쉬다가 졸업장을 받으면 내 대학생활은 끝이었다.


갑작스럽게 끝이 나버린 대학생활이 아쉬워서, 나는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겨울의 분위기와 합쳐진 건물들은 생각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동안은 학과건물과 도서관만 다녔다 보니 다른 곳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었다.

이제야 캠퍼스 전체를 둘러보는 나의 행동은, 그만큼이나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졸업을 앞두고서야 이런 여유가 생기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왔다.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갑자기 썩어 문드러진 감정이 올라오는 듯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진짜 내 대학생활이 끝났는데..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대학 이름이었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부산대학교'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것.

그런데, 공공기관에서는 아예 출신대학을 쓰지도 못하는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얻었는가?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캠퍼스 거리를 걸으며,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기억에 남을만한, 청춘을 장식할 만한 짜릿한 추억이나 경험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청춘은 누군가와의 깊은 인간관계없이, 그냥 공부로만 얼룩진 재미없는 책이었다.

내 페이지에는 누군가와의 달콤한 연애도, 여행도, 우정도 없는.. 졸작에 가까운 소설이었다.

아니, 이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 감옥생활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민망한 수기록에 가까웠다.


고작.. 고작 '부산대학교' 이거 하나를 위해서, 나는 이렇게 형편없는 청춘을 보냈나?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가장 빛나는 시기에 말이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숨고 싶었을까? 왜 그렇게 움츠러든 채 바깥세상을 탐험할 용기조차 가지지 못했을 까? 뭐 그리 대단한 공부를 한다고, 알바조차 안 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나?


분노에 가까운 감정은 한심한 나 자신으로 향했다.

'자학'에 가까운 감정이 치솟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비좁은 자취방은 역시나 공허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 청춘의 페이지들은 너무 삭막한 문체로만 쓰였다는 것을.

또래 친구들과의 재밌는 우정과 사랑 없이 혼자 외롭게 감정을 채워왔던 나의 청춘 페이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 청춘 페이지는 다시 쓸 수가 없었다.

읽어볼 수는 있어도, 거기에 적힌 내용들은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무정한 현실.


내가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은, 졸업 후의 다음 페이지뿐이었다.

나는 어서 다음 페이지를 준비해야 했다.



대학생활이 끝나고 나서 느낀 나의 공허한 마음은 금세 회복했다.

솔직히,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2월의 졸업까지는 학생이라는 신분이긴 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취준생일 뿐이다.


부산에서 취업을 할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서둘러 자취방부터 먼저 정리했다.

집주인아저씨가 굉장히 호쾌한 분이셨기에(여러 원룸 건물을 소유하셔서 부유하신 분이었다.) 별다른 무리 없이 보증금을 돌려받고 집을 정리할 수 있었다.


졸업식은 어차피 참석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1월에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고요하고 한적한 나의 고향은 역시 2년 동안 떠나 있었어도 변한 게 없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다녀도, 기억 속에 남은 풍경과 그대로인 곳에서 나는 진정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지난 2년간의 내 생활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힘들고, 외롭고, 적적했지만.. '지금' 마음이 편안하니 그 고생은 별 거 아닌 듯했다.


역시, 고향은 고향이었다.

편안해진 내 마음은 내 결심까지 풀어버렸다.

졸업 전까지 열심히 취업공부를 하려던 나의 마음은, 동네의 시냇물과 함께 흘러가버렸다.


영락없는 동네 백수가 되어 버린 나는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게임을 하는 백수의 삶이 시작됐다.


자취와 달리,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제공되다 보니 위기감이 없어졌고 그 없어진 위기감만큼 내 마음은 안일해졌다. '어차피 2월에 졸업하게 되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그때부터 열심히 살면 되지 않을까?

2년 정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으니, 다시 한 달 정도만 쉬어가자!'

나는 이렇게 결단을 내리고, 마지막 휴가라 생각하며 고향에서 마음껏 쉬었다.

죄책감이 조금 느껴지긴 했지만, 고향의 편안함에 죄책감도, 시간도 눈 녹듯 사라졌다.


눈 깜빡하자마자 1월은 지나가버렸고 졸업을 앞둔 2월 초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해야 했다.

집에서 공부를 하며 공공기관 정규직을 준비할 것인지? 아니면 일단 계약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경력을 쌓고 공부를 할 것인지? 사실, 내 선택지는 후자밖에 없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입이라도 하나 줄이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누나와 형도 본가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까지 들어오면서 집이 너무 좁아지기도 했고 그 당시의 누나와 형은 일을 잠깐 쉬고 있기도 했다.


나까지 쉬기에는 어머니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빠르게 취업공고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공기관 채용사이트를 뒤적거리던 와중에, 눈에 띄는 공고 하나를 발견했다.

수도권에 위치해 있는 데다가 무려 10명 넘게 뽑는 계약직 공고.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지원요건이 되는 공공기관 계약직인만큼, 급여는 최저시급에 가까웠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전공한 분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공공기관이었으니, 업무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공고를 좀 더 기다려 볼 수 있었겠지만, 빠르게 사회에 뛰어들고 싶었던 나에게는 이 공고만큼 적절한 게 없었다. 수도권 생활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

나는 서둘러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공고에 지원했다.

지금 보면 정말 부족하고 한심한 자기소개서였는데도, 나는 간단하게 서류를 통과했고 면접도 2대 1도 되지 않는 경쟁률이라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다.

합격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첫 출근도 2월 말로 잡혔다.


이렇게 간단하게 수도권 상경생활이 시작될 줄은 몰랐지만, 집에서 계속해서 늘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도서관에서만 이루어진 삶이었지만, 그 삶도 큰 결실을 맺지 못했다.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던 나는 너무나도 아쉬운 청춘을 보냈지만, 아직 나의 20대는 3년 이상 남았다.


대학생활 때 못 사귀었던 친구들을 다시 사귀고, 못 마셨던 술도 마시면서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리라.

과거의 후회와 미련을 발판으로 삼았으니, 나는 분명 대학생활보다 더 나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나는 인천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30살까지 내가 변변찮은 정규직 하나도 붙지 못하고 방랑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The End


이후의 이야기는, <공공기관 취업 실패기>와 이어집니다.

부족한 수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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