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기 알레르기

치유 방법은 아날로그 감성

by Nos

저는 IT 기기들을 좋아합니다.

정말로 좋아하는 분들의 수집목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평균을 기준으로 했을 땐 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노트북을 4개 정도 샀고, 모니터도 3개, 키보드도 5개를 샀습니다. (더 샀을 수도 있습니다.)

핸드폰은 3번 정도 바꿨고 아이패드도 3개를 샀네요.

이어폰도 2개를 샀으니 이 정도면 마니아 수준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기준보단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렇게까지 많이 산 이유는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마땅한 대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산 기기들로 처음엔 공부와 과제를 했고 나중에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주로 했네요.

제가 했던 이 활동들은 고사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보급형 스펙으로도 충분하죠.

하지만, IT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응당 그렇듯, 스펙에 타협 따위는 없습니다.

전 항상 최신 스펙으로 무장했습니다.


전자기기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히 제가 좋아하던 활동도 디지털로 대체되었습니다.

종이책으로 책을 읽던 저는 전자책 구독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종이책을 발견해도, 전자책으로 먼저 읽을 수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저에게 도서관은 실물로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보다, 핸드폰 안에 있는 디지털 공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글쓰기는 처음부터 종이로 써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 일기 쓸 때를 제외하면, 성인이 되었을 때는 항상 키보드로 글을 썼었죠. 좋은 티보드로 글을 쓰면 타건감 덕분에 쓰는 맛 자체가 좋고, 워드, 한글, 구글 문서, Pages 등등 아주 좋은 소프트웨어 덕분에 정말 편리하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설정만 잘 만지면 몇몇 프로그램은 정말 책을 채워가는 느낌으로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저의 모든 활동은 디지털로 이루어졌으며, 앞으로도 디지털로 이루어질 거라 믿었습니다.




이랬던 제가, 요즘은 아날로그 감성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종이책을 빌려 읽고, 공책을 사서 펜으로 글을 끄적입니다.

IMG_0898.jpeg 책상이 제 마음만큼이나 지저분하네요;;


밤에 무드등을 킨 채 글을 써 내려가는 제 모습은 저도 신기합니다.

모니터 3개에 20만 원이 넘는 키보드가 구비된 디지털 환경을 버리고, 굳이 불편하게 펜과 종이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디지털기기 알레르기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신체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절대 아니고, 하루 종일 디지털기기 앞에 앉아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조금 피폐하고 공허한 느낌이 나더군요.

무언가를 생생하게 만지거나 내 손 때를 묻히는 느낌이 없는 이 유령 같은 감각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공책과 펜을 사서 글을 쓰고 종이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디지털 기기보다는 사실 훨씬 불편합니다. 그럼에도, 이 불편함이 주는 감성과 편안함이 분명 있습니다.

디지털 디톡스를 왜 하는지 알겠더군요. 디지털이 주는 과도한 자극과 빠른 정보 전달을 피하게 되니, 확실히 거기서 오는 피로가 줄어듭니다.


이 아날로그 시간을 추가하고 나니 디지털 시간과 묘한 균형을 이룹니다.

주간 시간 동안 디지털을 이용하여 열심히 글을 쓰고, 편집하고, 여러 활동을 하고 나면 밤에는 이제 아날로그 시간으로 돌아갑니다. 밤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정신이 피폐해집니다.

탁자에 무드등을 켜고, 그 앞에 공이책과 종이책을 펼쳐서 열심히 읽고 씁니다.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기고, 펜촉으로 한 획씩 그으며 글을 쓰는 재미는 디지털 기기로는 못 느끼는 촉감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면 자세도 불편하고 손이 아픕니다.


다시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여 책을 읽고 글이 쓰고 싶어집니다.

다음 날 아침에 디지털기기를 이용하며 '역시 이게 최고지, 효율 진짜 좋네'하면서 즐기다가 저녁이 되면 또 보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면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서 글을 씁니다. 이 순환은 아침과 밤으로 나뉘었다가, 점점 짬뽕이 되어 갑니다. 글을 쓰는 수시로 저는 키보드와 펜을 옮겨 다니게 됩니다.


마치 시소를 타듯이 왔다 갔다 하며 저만의 균형을 잡아갑니다.

혼자 타는데도 둘이 타는 것보다 더 재밌습니다.




우리는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워낙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시대에 이는 당연합니다.

효율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휴식의 시간이 주어지니까요.


하지만, 이 효율성이란 건 무시무시한 괴물입니다.

끊임없이 이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목적지를 어떻게 가야 가장 빠르게 갈지 고민하고, 그 목적지에서 어떻게 동선을 짜야 '뽕'을 뽑는지 추구하는 과정은 정말 재밌고 즐겁기만 할까요?


반대로, 불편함은 뜻하지 않은 즐거움과 감성을 줍니다.

자동보다 스틱을 이용한 수동 운전이 불편한 건 당연함에도, 수동 운전을 즐기시는 분들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행은 아무런 불편함 없이 즐긴 것보다, 어떤 착오로 인해 고생을 한 기억이 훨씬 강렬하게 남는 것처럼요.


뜻하지 않게 비효율성을 감수하고 아날로그 시간으로 돌아간 경험은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효율과 기능만 추구하던 제가, 이렇게 감성을 즐길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전자기기는 사용할수록 닳고, 솔직히 크게 애착이나 정이 안 생기는데 공책은 다르더군요. 사용할수록 꾸깃꾸깃해지고 낡아가는 그 모습은 점점 더 애착이 갔습니다. 사람들이 왜 공책을 안 버리고 모으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건 저와 함께 낡아간 제 분신이니까요. 저 자신을 버릴 순 없는 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묘하게 차가워지고 정이 없어진 요인 중 하나가 어쩌면 디지털의 차가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술이 발전하여 다시 그런 아날로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지만, 이렇게 아날로그적 시간을 한 번쯤 즐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책을 읽고 글을 쓰시는 분들은 정말 꼭 한 번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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