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나는 나와야만 했다.
집이 어려워진 지 오래였고, 한 사람이라도 빠져야 다른 가족이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게 나였다.
언니도 오빠도 없는 나는, 모든 것을 상의할 누구도 없이 혼자서 결정하고, 혼자서 책임지고,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것이 어린 나이에는 너무 버거웠다. 많이 울었다. 나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었으니까...
버거울 때면 내가 할 수 있던 유일한 것은, 한강에 가서 하염없이 반짝이는 한강 다리와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공부를 좋아하던 나는,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의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했던 적이 있었나... 부러움의 감정이 내 삶을 바꿔놓진 않는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온 곳.
무서움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런 감정 모두 사치스러웠다.
나는 무작정 시작했다. 독일어 배우기, 사람들 만나기, 짧은 독일어로 무조건 부딪혀보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며 살았다.
나와 보니, 좋은 조건의, 좋은 환경을 갖고, 아주 호화로운(?) 독일의 삶을 시작하는 수많은 유학생과 한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부러웠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러움이 현실을 바꾸진 않는다. 나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들이 맛있는 거 먹을 때, 나는 식빵 하나 먹으면서 시험 공부했고, 그들이 여행 갈 때, 나는 더 깨끗하게 책상 정리를 했다. 그렇게 버텨내었다. 누구보다도 빨리 시험에 합격하고 싶었다. 어떤 때는 참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 어떤 때는 멈추지 않는 눈물, 모든 것이 다 억울함으로 다가오는 터널의 시간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참아야 했다.
견뎌야만 했다. 여기나 저기나 힘든 건 마찬가지였기에, 내가 가진 상황 내에서 나는 언제나 그랬듯 무조건 해내야만 했다.
부담감이 뭔지도 몰랐고, 고통이 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매일 버텼다. 이 악물고 버텼다.
한국 가족들이 몰라주어도, 서러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매일 눈물이 나는 또 이 악물고 참아가면서 버텼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가올 하루가 기대되기를 기도했다.
저녁에 눈을 감기 전, 밤에 잠자는 시간만큼은 고요하길 기도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이어리에 적어놓았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때는 몇 초만에 읽을 한 페이지가 되어, 그럴 때도 있었지.. 하고, 긴긴 하루,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지만, 그 미래에는 미소로 회상하게 되기를 소원했다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곳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독일 사회로 깊숙이 들어와서야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너무 많다.
그제야 알게 된 중요한 현실은,
이곳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요한 건 100년 후에도, 모든 것은 그대로 멈춰서 시간만 흘러갈 것이다. 수많은 독일인이 자랑삼아 얘기해 줬고, 수많은 외국인이 이곳에 욌다가 다시 귀국하는 이유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편한 대로의 해석'을 하고, 현실의 참뜻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알고 있던 것이었다.
맙소사.
정말 다르게 너무 좋게, 마치 그럴듯한 포장으로 애써 위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다. 나와는 정 반대의 것들을 풀세트로 갖고 있는 이곳의 삶에서, 살아내야만 한다.
그러려면 지금껏 그랬듯이 견뎌내야만 한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정말 감사한 게 하나가 있다.
이제는 어떤 차별과 모욕과, 부당함 앞에서, 두렵지 않다는 것. 1시간이건, 2시간이건, 나와 내 아이들, 우리 가족을 위해 이들과 맞설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100번 중 1번 정도의 확률로) 친절함을 만날 때면, 더없이 친절함에 보답하고, 부당함엔 나의 목소리를 주장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하다.
20대부터 시작해서 40대가 되었다.
아주 길고 긴 독일 삶의 체험을 지금도 하는 중이다. 버라이어티 하지만, 매 순간이 귀중한 경험이고, 넓은 세상의 삶에서 큰 배움을 통해 점점 더 단단해졌기에 버틸 수 있는 힘이 아직은 남아있어서 그래도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하다.
내일도 나는 견뎌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