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백신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 '휘슬'
태권도를 할 때 전권을 다 읽고 '축구선수'가 될 걸 그랬다며 후회했던 생각이 난다.
축구는 매일 몸풀기 운동으로 해왔어서 여자지만 남자아이들만큼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운동장을 누비며 공을 뻥! 하고 찰 때의 후련함!!
공을 빼앗고, 뻇기지 않기 위해 어깨로 상대방을 막아서고 물고 늘어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이가 들어, 학교 체육수업을 할 때 아이들에게 '패스' '드리블' 같은 것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탓과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제대로 알려주기가 어려웠다.
동네에 여자 축구팀이 있는지 알아보고 지역에 fc가 있는 것을 확인 후 입단했다.
사람들은 요즘 '골때녀'가 유행이라 들어왔다며 통성명을 했다.
30~50대로 이루어진 아줌마 축구단.
나는 당연히 아줌마 중에서는 내가 제일 잘하지 않을까 했는데, 이게 웬일.
아줌마들 보통 날렵한 게 아니다. 힘은 또 어찌나 좋고, 목소리가 겁나게 커서 쩌렁쩌렁 운동장을
울린다.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줌마 앞에서는 나대지 말아야 이쁨을 받는다)
유니폼, 등번호는 35번.
이름도 새겨진 단체복을 입고 잔디를 달리니 오랜만에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문제는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것이었다.
작업도 내팽개치고, 마감도 미뤄가며 축구에 미쳐있는 날 보며 아빠는 당장 축구를 그만두라며
화를 내셨다. 나이 마흔이 다 된 딸이 일도 안 하고, 살림도 팽개쳐 가며 축구에 환장을 했으니
어이가 없으셨겠지.
나는 이렇듯 뭐 하나에 빠지면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
그래서 힘든 날이 많지만 한 번도 미련을 갖거나 후회를 한 적은 없었다.
방과 후 체육시간, 오늘은 축구수업을 하기로 했다.
축구단에서 배운 기술을 알려주기 위해 줄을 세웠는데, 이거 뭐야? 얘네 엄청 잘하잖아!!
큰일이다. 나는 아직 볼 컨트롤도 잘 못하는데 이 녀석들은 빠르고 정확하다.
나는 이번에도 나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고, 휘슬을 불며 심판으로 슥- 빠졌다.
그렇게 입으로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좋아한다고 했지, 잘한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나의 찌질한 고민을 듣던 마포구 여자축구팀에 있던 내 친구는
특훈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팀에 게스트로 불렀고, 나는 서울까지 가서 축구를 배웠다.
야간에 불이 켜진 풋살 경기장에서 미니게임을 하는데 발이 이렇게 느릴 수가 없다.
나 때문에 경기도 진 것 같은데 공짜로 햄버거까지 먹고 와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야 너는 어차피 잘하지도 않는데 왜 잘하려고 하냐? 그냥 즐겨!"
친구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띵 한 소리가 난다.
축구뿐 아니라 매사 잘하지도 않고, 잘할 수도 없는 것들을 잘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뭔가를 빨리 포기하기도 하고 상처받을까 흥미를 잃은 척 회피했던 경험이 또렷이 생각났다.
즐겁게, 무언가를 즐긴 적이 있었던가?
<목표 - 시작 - 목적달성>의 시간 순으로 모든 일을 해치워 나갔던 날들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다시 아이들과 운동장에 서보니, 아이들 표정이 온전히 행복하다.
같이 뛰면 그만 인 것을 잘해보려고, 가르치고, 알려주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실력을 들킬까 심판으로 빠진 것도 비겁했다.
오늘은 호루라기를 내려놓고, 아이들과 편을 갈라 섰다. 나는 성인이라 두 아이가 한몫으로 가고 나는 좀 더
부족한 실력의 팀으로 가게 되었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우리는 어젯밤의 비로 다 마르지 않은 진흙 같은 운동장을 달리고 넘어졌다.
아이들은, 넘어져도 일어서고
울기보단 툭툭 털기를 선택한다.
축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민첩함과 체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방향을 잘 보는 것이었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계속 움직일 수 있다.
공이 오지 않아도 뛰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그 시간엔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는다는 것을 삶을 통해 알아간다.
그래도 단 한 번의 골을 위해
인생의 찬스를 잡기 위해
맨땅을 달리고 또 달릴지라도
지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막내아이를 낳고 1년이 지났을 즈음 오랜만에 축구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요즘 뭐 해? 축구하러 나와야지!"
그 말이 어찌나 반갑고 설레던지.
올봄엔 운동장에 나가볼까, 가만 상상하며 겨울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본다.
40대, 인생의 전반전이 지났다.
이제 체력을 비축하고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해야겠지.
전반전만큼의 체력은 없겠지만, 그때 했던 실수를 반복할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리라 기대해본다.
운이 좋다면 연장전까지 이어지고 언젠가 승부차기를 하는 날도 있겠지?
빠르지 않아서 남들보다 체력이 없어서 고민이라면 방향을 보자.
지치지 않고 계속 움직이다 보면 우리에게도 꼭 한 번은! 공이 올 것이다.